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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회사후소(繪事後素), 통합 형식보다 본질이 중요

지도자는 책임으로 말하고 바탕 위에 미래를 그려야 한다

[완주신문]공자의 제자 자하가 시경의 한 구절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을 마련한 뒤에 한다(繪事後素).”

 

형식보다 본질이, 채색보다 바탕이 먼저라는 뜻이다. 흰 바탕이 없으면 아무리 곱게 색을 칠해도 오래 가지 못한다. 정치와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먼저 세워야 할 것은 ‘외형적인 모습보다 내면적인 충실함’이 중요하다.

 

그러나 최근 전북 정치권은 전주·완주 행정통합을 ‘전북 발전의 필수 조건’처럼 내세우고 있다. 정동영 의원은 “100년 전 철도시대, 세 번의 통합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지만, 전북이 뒤처진 까닭은 통합 무산 그 자체가 아니다. 산업 기반, 인재 육성, 균형 정책이라는 바탕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작부터 사실 왜곡도 있었다. 김관영 도지사와 우범기 전주시장은 “완주군민이 먼저 통합을 건의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두 사람이 선거공약으로 꺼낸 것이 발단이었다. 이후 ‘군민 선택’이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지도자의 자세라 보기 어렵다.

 

맹자는 이런 책임 회피를 이를 일찍이 꾸짖은 바 있다.

 

“백성이 굶어 죽으면 ‘내 책임이 아니라 흉년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찔러 죽이고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칼이 죽였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정치인은 결과를 떠맡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완주군의회의 태도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 의회는 통합이 현실화될 경우 차기 지방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지역 존립과 군민 의사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 미래를 내려놓은 결단이었다. 이는 통합을 ‘되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접근한 도지사와 시장의 태도와 극명히 대비된다.

 

지도자의 책무는 결과를 감당하겠다는 각오임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한 찬성 측은 통합 ‘성공사례’라며 청주시를 내세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창원시는 2010년 7월 통합시 ‘규모의 경제’를 내세웠지만 행정비용 급증, 갈등 심화, 인구 정체로 어려움을 겪었다. 청주시(2014년)도 마찬가지다. 성장 배경에는 세종시 출범(2012년), 오송생명과학단지 준공(2010년) 및 식품의약안전청 등 국책기관 이전, 오창 제2산단 준공(2012년)이 있었다. 통합 덕분이 아니라 외부 요인에 따른 성장이다. 통합 이후에는 지역 불균형이 더 심화되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결국 전북의 발전은 ‘합치면 된다’는 주술이 아니라, 각 지역이 가진 강점을 살리고 협력하는 전략에서 나와야 한다.

 

무리한 통합은 주변부를 황폐화시키고 주민 자치를 약화시킨다. 읍·면 단위에서 주민이 주체가 되어 삶의 질을 높여가는 길이 가장 건강한 발전 경로다.

 

그런데도 도와 시는 군민이 반대하는데도 ‘전북 발전’을 명분 삼아 밀어붙인다. 이는 주민주권과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발상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눈앞의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지역의 지속가능성과 군민 삶을 최우선에 두는 선택이다.

 

과거를 ‘놓친 기회’로 포장하는 채색이 아니라, 주민의 삶과 자치라는 흰 바탕을 지키고 더 두텁게 하는 일이야말로 지도자의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훗날 회자후소(會者後笑), 즉 비웃음의 역사만 남길 것이다.

 

바탕 없는 통합은 전북을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라놓는 칼날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지혜를 되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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