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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죽은 시인의 사회

[완주신문]기억하는가? 시(詩)가 인간의 정서를 쓰다듬어 주던 그때를. 시를 읊조리며 자유와 고독에 심취하던 그 낭만을. 시간의 샘[井]에서 느리고 게으르게 자아를 퍼 올리며 꿈을 찾아 방황하던 그 청년을.

 

경쟁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일삼아 시를 암송하거나 느끼는 것은 효율적인 공부법이 아니다. 시란 그저 운율과 음조를 따져가며 시험 출제 유형을 익히는 대상일 뿐이다. 이 때문에 현대 청소년들은 더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시의 상징체계와 은유를 분석하지만, 시에 담긴 의미를 음미하지는 않는다. 시어 속에서 든 그리움이나 외로움 때문에 밤을 뒤척이는 대신 시인조차 풀지 못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며 새벽을 맞는다. 이렇게 청소년들은 진작부터 성과 사회(成果 社會) 이면에 축적된 피로와 탈진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 시대 교육은 미래의 더 나은 삶을 볼모로 그들에게서 ‘시’와 ‘시간의 샘’을 빼앗았다.

 

현대 청소년들은 어느 시대보다 뛰어난 학습능력을 보유한 주체들로 명민하고 이성적인 존재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가 배제된 교육이 길러낸 이들의 정서는 거칠고 메마르다. 심지어 포악하기까지 하다. 지난 4월 모 중학교 2학년 이민호(가명·14) 군이 또래 학생 13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폭행한 학생들은 시를 읽는 대신, 숨을 쉬지 못하게 해 순간적으로 기절하게 만드는 ‘기절놀이’ 중 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군을 폭행해 기절시키고, 다시 깨워 폭행하는 것을 놀이 삼아 했다. 이외에도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영광 여고생 성폭행 사망 사건, 광주 집단 폭행 사망 사건, 이 모두를 10대들이 저질렀다. 이 범죄들에는 타인의 고통이나 상처에 대한 연민 같은 인간적 정서 자체가 결핍되어 있다.

 

이 사건들에서 기성세대가 고려할 것은 ‘상황’ 그 자체가 아니다. 도대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며, 무엇이 청소년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참담할 것이다. 

 

미국 영화감독 피터 워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교육은 사회적 성공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시(詩)가 흐르는 교실’의 학생들은 사물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 해안(解顔)을 넓히고, 삶의 가치를 높여줄 아름다움을 찾아 고뇌한다. 시는 그들의 인생을 대단한 것으로 만들고, 사랑을 삶의 목표로 삼게 한다. 시가 있는 학창시절은 화려한 연극의 연속이고, 한 사람의 삶은 또 한 편의 시가 된다. 여기서 ‘차이’는 다양성을 더 해주는 조건이지 박해의 대상이 아니다. 시에 담긴 보편적 정서가 학생들 사이를 매개하는 공통감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시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원천이 된다. 

 

피터 워의 의견에 따르면 교육 방식에 따라 시(詩)에 접근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예컨대 자유와 고독에 심취하여 읊조리는 낭만적인 시는 사람의 내면을 성숙시켜 외부 조건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갖게 한다. 반면 시험 출제 유형을 위해 익히는 시는 학생에게 열등감과 경쟁심을 부추긴다. 감성으로 만나는 시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키워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만, 시를 사회적 성공 수단으로 삼을 경우 지연된 욕망 때문에 불만만 쌓인다. 

 

불만으로 인해 공허해진 청소년들은 우울함을 달래려고 기절놀이를 한다. 숨 막히는 교육 시스템에서 합리적인 저항 방법을 모색할 수 없었던 아이들은 인간의 도리를 엎어버린 집단 성폭행에 나섰다. 더 늦기 전에 청소년들에게 시를 돌려 줘야 한다. 시간의 샘에서 느리고 게으르게 자아를 퍼 올리며, 충분히 고뇌하고 방황할 수 있는 ‘시 읽을 시간’을 줘야 한다. 눈을 감고 몸을 천천 흔들며 시의 운율을 느끼게 해야 한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시의 소리를 들려주며, 경쟁으로 피로에 지친 그들의 정신에 휴식을 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