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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전체주의와 사회적 거리두기

[완주신문]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속성 중 하나는 사회성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정투쟁을 통해 삶을 연대하는 속성이다. 때때로 전쟁이나 전염병같은 혼란으로 인간 관계양상이 변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인류는 언제나 서로에 의해 삶을 지탱해왔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조건인 동시에 본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코로나19가 지구를 뒤 덮자, 정부는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다. 완주군도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긴급지원금으로 사업 중단 시 발생하는 비용을 지원키로 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전된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코로나19를 저지하는데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고유한 속성을 고려할 때, ‘거리두기’ 정책은 가당치도 않는 발상이다.

 

이 조치의 궁극적 목표는 생명보존이다. 즉 코로나19로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면, 사회성을 통해 형성된 정애(情愛)는 접어두고, 정부의 행정 조치를 따라야한다. 이 경우 자기 주변의 모든 존재들을 관찰 대상으로 삼는 것이 옳다. 그 누구라도 코로나19 증상을 발견할 경우 ‘1339’ 에 신고해야한다. 이를 어길 시 감염병 예방법에 의해 천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1년 이하의 징역형 처분을 받는다. 정부는 텔레비전 광고를 활용해 수시로 현재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며 타인과의 거리두기만이 살길이라고 강조한다. 각종 매체에 노출된 사람들은 가족관계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심지어 과도한 건강 염려증에 길들여진 대중들은 대인기피증 같은 집단 공황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이제 타인은 지옥이 되었다. 

 

이 현상에는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경고한 전체주의적 통제 징후마저 드러난다. ‘1984년’은 전체주의적 사회상을 보여준다. 주인공 윈스턴에 따르면 이 나라에는 사회를 통제하는 성문화된 법이 없기에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뚜렷한 기준도 없다. 다만 내면화된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할 뿐이다. 이 국가에서 시행하는 가시화된 모든 행정명령은 ‘사회 안정’을 향해 있다. 윈스턴의 이웃 스미스는 ‘1984년’의 대표적 인간상인데, 그는 혼란을 사회악으로 간주하는 대부분의 시민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래서 일절의 비판적 사고 없이 국가의 명령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를 너무나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스미스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 하지만, 결코 인간적 공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이상 징조를 포착하면 언제라도 정부에 신고해야 할 의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의 자녀들은 부모를 감시하는 사상 경찰관으로 사소한 언행도 놓치지 않는다. 부부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정부는 텔레비전의 일종인 대형을 활용해 수시로 사회적 거리두기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시민의식을 강화한다. 

 

그런데 ‘1984년’의 이 모습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정부의 시책과 유사한 점이 많다. 물론 ‘1984년’의 정치 시스템을 코로나 사태와 동일 선상에서 평가하는 것이 과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1984년’의 거리두기는 전제정부의 정치 옹호와 유지를 위해 악용되는 것이지만, 코로나19 시대의 거리두기는 한시적 조치로 시민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특단 조치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사회 질서 유지와 안정을 목표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는 점은 같다. 또 1984년의 스미스와 코로나19시대 시민은 주변사람들에게서 이상 징조를 적발했을 때, 시 당국에 고발해야한다는 사실도 비슷하다. 이를 어길 시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두 국가 모두 법적 처벌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거리두기가 강요될 경우, 타인을 잠재적 악으로 간주하는 대중심리현상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는 상호 신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조지오웰은 전체주의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적 특징이 상호 불신이라고 말한다.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는 전염병이 상시적으로 우리 일상을 지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코로나19에서 불거진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시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조지오웰의 전체주의적인 사회적 거리두기가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상황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완주군민들이 ‘1984’년의 스미스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개인적 차원에서는 비판적 관점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에 접근해야한다. 이를 위해 관계 속 상호신뢰를 잃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을 잠재적 바이러스 숙주로 간주하는 관찰 대상이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동지로 받아들여야한다. 또 사회적 차원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정치적 전략으로 활용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감시해야한다. 군민연대 조직을 작동하여 정부의 미디어 사용을 수시로 체크해야한다. 언론의 투명성과 정보의 객관성을 확보함으로써 대중의식이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