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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반대 문수스님 소신공양 10주년

몸속까지 태우기 위해 휘발유 마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위해’ 유서
봉동읍 출생...봉동초・완주중 졸업

[완주신문]경북 군위군 지보사 선방에 머물던 한 스님이 지난 2010년 5월 31일 오전 7시20분 절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 2만5천원 어치를 샀다. 이후 400m를 걸어서 위천이 보이는 잠수교 옆 둑에 올랐다. 이곳은 당시 4대강 사업 구간 중 가장 규모가 큰 낙동강의 제1지류다. 스님은 주유소에서 사온 휘발유를 온 몸에 뿌리고 반말 가까이 마셨다. 몸속까지 태우기 위해서다. 이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불교에서는 이를 자기 몸을 태워 부처에게 바친다는 ‘소신공양’이라 부른다.

 

새까맣게 타버린 스님 옆에는 가지런히 개어 놓은 승복과 흰 고무신이 놓여 있었다. 승복에는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문수(文殊)’라고 적혀있었다.

 

소신공양으로 입적한 문수스님은 당시 3년간 선방을 나오지 않고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사흘에 한번 지보사 총무스님인 견월스님이 방에 신문을 넣어줬을 뿐 신도들도 문수스님을 본 적이 없었다. 스님은 하루 한끼만 먹었는데 그 한끼도 떡 한쪽이 전부였다.

 

같은날 오전 10시30분 지보사에서는 견월스님이 문수스님 방을 찾았다. 하지만 방에 스님은 없고 ‘원박스님, 각운스님 죄송합니다. 후일을 기약합시다’라고 적힌 쪽지만 있었다.

 

3년간 마주쳐도 간단히 인사만 하고 지나치던 문수스님이 전날 저녁 평소와 다르게 견월스님에게 말을 걸었다. 견월스님은 놀라우면서도 반가웠다. 30여분 대화가 이어졌다. 문수스님은 1998년 승가대학 총학생회 회장 당시 같이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와 속가 이야기까지 털어놨다. 이어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과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걱정했다. 아울러 누군가 나서 4대강 사업을 막아야 하는 건 아닌지도 이야기했다.

 

이러한 전날 대화로 견월스님은 문수스님을 찾았지만 소식은 오후에 경찰을 통해 들었다. 문수스님은 군위군 군위읍 삼성병원에 안치됐다. 수행에만 엄격했기에 근래 사진이 없어 승가대학 때 찍어둔 사진이 영정사진이 됐다.

 

그렇게 떠난 문수스님이 머물던 방에는 텔레비전 한대와 서랍장 하나가 전부였다. 방에서 발견된 쪽지에 적힌 각운스님은 당시 언론을 통해 “평소에 (문수)스님과 ‘소신공양’을 하게 되면 이렇게 하자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각운스님에 따르면 문수스님은 즉흥적으로 소신공양을 결정한 게 아니다. 1일 1식을 하면서 속을 비우고 살을 빼면서 치밀하게 준비했다. 경찰도 사람 몸속의 내장까지 다 타들어간 경우는 처음이라며, 도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놀라워했다.

 

문수스님이 떠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완주군 모악산 대원사에는 문수스님 분향소가 있다. 이곳 주지인 석문스님이 10년전부터 매일매일 문수스님을 기리고 있다. 두 스님은 도반이었다. 예전 같은 선방에 머물면서 인연을 맺어 석문스님이 대원사 주지로 온 2000년 문수스님도 함께 이곳에서 2년정도 살았다.

 

석문스님은 문수스님에 대해 “선방에서만 지낸 철저한 수도승이었다”며, “엄격한 수행으로 사리분별이 명확했다”고 회상했다.

 

지난 2010년 6월 12일 문수스님 추모제가 완주군 봉동읍 둔산공원에서 열렸다. 문수스님 고향이 봉동이기 때문이다. 1963년 봉동읍 구미리 중리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봉동초등학교 51회, 완주중학교 29회 졸업생이다. 이에 동창들과 지역주민들이 추모제전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문수스님이 ‘봉동의 의인(義人)’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봉동지역의 정신적 지주로 거듭나길 기원했다.

 

당시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완주 송광사 도영스님, 금선암 덕산스님, 대원사 적묵스님 등 20여명의 스님들과 전주 바라밀 합창단, 익산 가릉빈가 합창단을 비롯한 지역의 불자, 봉동읍 주민 500여명이 참석했다.

 

도영스님은 추모법어에서 “문수스님의 육신은 갔지만 스님의 정신만은 대한민국의 많은 분들에게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며, “우리지역에 의인이 나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스님의 큰 뜻을 마음속에 새기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스님의 큰 뜻을 이어가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도반들은 문수스님이 도서관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전한다. 말수는 적지만 행동하는 스님이었다. 이에 조계종의 종단 개혁 때 범종단개혁추진위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2007년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 지보사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