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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입당원서 몰아주기 블랙코미디

[완주신문]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완주군 후보자들 간에 입당원서 받기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대의정치(代議政治)가 정당정치로 전개되는 현 상황에서 정당의 뒷받침 없는 정치활동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재로 공천 없이 의회에 진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현대 정치 방식이니, 그 자체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완주군을 점령한 특정 정당의 집안싸움에 휘말려든 군민들의 불편한 처지와 주류 정당에 대한 확증편향(確證偏向)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제고되어야 한다.

 

“아는 체면에 안 해 줄 수도 없고, 또 누구에게는 해주고 누구에게는 안 해 줄 수도 없어서….”

 

이런 상황에서 중복 입당원서 쓰기는 기본이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완주군수와 전라북도의원 외에도 완주군의회의원까지 새로 뽑힐 예정이다. 여기에 참여할 입후보자 대부분은 민주당으로부터 공천 받기를 원한다. 후보자 풍년이 든다면 수십 명에 이를 것이다. 약간 과장되게 말하자면, 완주군에서 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안면(顔面)을 깎기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수십 장의 입당원서를 제출해야한다는 의미다. 동일한 당을 향해, 각각의 다른 후보자를, 각각 지지한다는 수십 번의 읊조림을 거쳐야 삶의 인정투쟁에서 버텨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 좋은 완주군민이 처한 정치적 실존이다. 이건 코미디다. 자발성을 상실한 표심이 얼마나 무력한지, 정치집단 체제 형성원리가 얼마나 허당인지를 여실이 드러내는 블랙코미디다.

 

임마누엘 칸트가 보기에 위의 상황은 특정 정당의 정치적 과욕이 군민을 자기 보존 수단으로 삼은 결과다. 유권자의 자율적 의사와 사고능력이 박탈되어 벌어진 해프닝인 셈이다. 이런 상황을 염려한 칸트는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은 목적 그 자체여야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도덕 제1원리로 삼았다. 이 원리를 떠받치는 기본 전제는 보편적 도덕법칙을 끌어내는 ‘자기 마음의 격률’이다. 

 

그에 따르면 이성을 지닌 존재라면 누구나 숙고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기 내면에서 우러난 도덕법칙을 바탕으로 행위의 준칙을 마련할 수 있다. 이 경우 인간은 목적 그 자체로서 자기 신념을 가진 존재가 된다. 하지만 타인이나 외부 집단에 의해 수단으로 전락할 경우, 이성적 존재로서 존엄성은 파괴되고 도덕주체로서 능력도 상실한다. 이렇게 수단이 된 인간은 압제자의 형편에 따라 확증편향화된 이념에 젖은 채, 비판적 사고력을 상실한 무력한 존재가 된다. 칸트가 보기에 현재 완주군민이 처한 상태가 바로 이렇다.

 

칸트가 뭐라고 하든 정치인의 입장에서야, 중복 입당원서 쓰기에 동원되는 좋은 사람이 많은 완주군은 더 없이 훌륭한 정치마당이다. 이곳에는 정치공약을 그저 공약으로만 이해해주는 군민들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믿음을 저버려도 언제나 다시 받아주는 군민들의 넉넉한 표심 덕택에 정치적 다양성이 빚어내는 갈등 따위는 없다. 상황이 이러니 이곳 정치인들은 블랙코미디 연출자로서 자신의 역할이 충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주시민으로서의 자발적 신념과 자부심을 중시하는 칸트 입장에서, 이는 절대로 온당한 상태가 아니다. 그는 이제라도 안일한 집단권력체제의 타락한 정치 행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래야 우리는 완주군의 발전을 이끌어낼 ‘자기 마음의 격률’에 따라 정당을 선택하고, 이상(理想, ideal)을 대변해줄 정치인을 위해 투쟁할 줄 아는 존엄한 유권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다양한 정당의 범람으로 신념의 정체 현상이 일어나는 정치마당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또 표심을 갈구하는 후보자들의 갈등에서 불거져 나온 정치적 언술들이 싹을 틔우고 달콤한 열매도 맺을 것이다. 유권자의 마음을 잡고 싶은 어떤 정당의 후보자는 군내 산업 쓰레기 폐기물 처리 문제며, 삐걱대는 부동산 정책을 바로 잡으려 혼신을 다할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정당의 후보자는 청년 실업 해소라든가 그간 미봉되거나 은폐되어온 온갖 문제를 수면위로 띄워, 완주군민을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할 공약을 지키려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이 입당원서 몰아주기 블랙코미디를 멈추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완주군민 한 사람 한사람의 자발적 숙고와 선택만이 건전한 정치 풍토를 조성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