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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청년들을 떠나게 하는 부동산 가격

[완주신문]인간에게 집은 무엇일까? 연장선(延長線)이라는 물리적 특징을 지닌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간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공간속에서 일정한 자리를 잡고 ‘삶을 살기위해 만든 것’이 집이다. 집은 육체적 행위의 실용적 공간이며, 사회적·문화적 상황에 귀속됨을 증명하는 공간으로 한 개인이 살아가는 중심점이다. 이렇게 집은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음으로, 이것은 삶의 첫 번째 조건이다. 다만 시공간에 따라 그 형태나 가치척도가 변해왔을 뿐이다.

 

우리 시대는 이를 자본적 가치로 환산하여 부동산이라 통칭한다. 집과 인간의 관계를 고려할 때 국가의 부동산 정책이 시민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중요한 사안이니 만큼 이 정책 방향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부동산을 시장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옳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국가 개입을 통한 분배정책 필요하다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완주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들은 어느 쪽을 지지할까?

 

완주군 행정부는 부동산을 시장에 완전히 맡겨버리는 신자유주의자를 채택한 것인가? 삼봉신도시 개발을 앞두고, 택지 분양 단계에서 한 건설사가 3.3㎡당 900만원에 육박하는 아파트 분양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를 두고 일개 건설사가 저런 가격을 제시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군민들은 들썩거리는 부동산 값 때문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땅값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로 투기꾼들이 모여들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원주민들의 삶에 토대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주군 행정부는 이에 대해 일체 말이 없다. 무엇을 하든지 세액 증대에 효율적이기만 하면 된다고 판단한 걸까?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자본주의로 운용되는 사회의 민생고는 집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주인공 김불이는 서울 변두리 ‘낙원구 행복동 46번지’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살았다. 재개발을 두고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는 주민의 삶을 지켜내겠다는 낙원구 지역 후보자들의 공약을 믿고 또 믿었다. 철거 계고장을 앞에 둔 그에게는 전 생애를 바쳐 얻은 집 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 가족이 햇볕 바른 마루에서 아침밥을 먹던 날, 결국 강제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그렇게 그들은 존재의 본질을 담보하던 집을 잃음으로써 삶을 파괴당했다.

 

김불이의 생(生)을 볼 때 부동산 가격이 너무 비싸 온힘을 다해 노력해도 집을 구할 수 없거나, 전 생애를 집구하는데 바쳐야하는 사회는 아주 나쁜 곳이다. 이는 자본적 효율성만 중심에 두고 부동산 가격을 들썩거리게 만들거나 지대 값을 전적으로 시장에 내 맡기는 정부의 무책임에서 기인한다. 이렇다면 부동산 가격을 ‘잡지 않는’ 행정부는 정주적 본질에서 기인한 본성적 불안조차 정치적 기회비용으로 소비하는 악한 집단이다. 삼봉신도시 신축 아파트가 3억대를 육박하는 완주군은 어떨까?

 

이대로 간다면 범위가 넓지도 않는 한 지역 내에서 어떤 신축아파트는 3억을 호가 하지만, 5년 이상 된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 가격은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완주군민들은 일부 소상공인과 부농을 제외하고 대다수가 서민과 영세 농업인이다. 이들은 지역 주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완주군 행정부의 정치 공약을 믿고 있다. 그런데  완주군이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부동산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군민들에게 상대적 빈곤감을 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동산은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인데, 그릇된 부동산 정책은 지역 내 자본격차를 심화시킬 수 있다. 이는 지역 내 구성원들의 연대감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고, 지역 주민들의 자존감마저 손상시킬 수 있다. 어쩌면 김불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불행이 도처에서 생겨날지도 모른다. 이제 삶을 시작한 청년들이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을 감당할 수나 있을까?

 

고산에는 ‘아트스테이 풀’이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완주에서 한 달 살아보기’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집살이를 통해 청년작가들은 삶과 예술을 체험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술과 삶은 괴리된 듯 보이지만, 기실 예술의 근원은 삶이다. 청년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취한 주민들의 마음은 설렘과 즐거움으로 가득해진다. 이들의 부산한 움직임에서 희망을 읽기 때문이다. 이처럼 젊은 청년들이 즐겨 찾고 자신의 생애를 보내고 싶은 완주로 만들려면 어떤 부동산 정책이 필요할까? 이들이 원하는 것은 분명 김불이를 죽음으로 내몬 신자유주의 부동산 정책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완주군이 삶의 정주적 본질을 무시한 채 자본격차를 심화시키는 자유방임으로 일관한다면, 삶의 근원을 잃은 청년들은 떠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