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신문]조선 정부는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과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하고, 동학을 그릇된 교리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교(邪敎)로 단정하며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로 인해 동학교도는 관원(官員)은 물론 토호(土豪) 세력에게 핍박과 탄압과 수탈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1890년대 이전까지 동학 지도부와 교인들은 동학교도로 지목되어 체포당하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돈을 바치는 ‘속전(贖錢)’으로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해 다른 고을로 도망을 하거나 피신하는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동학은 관의 탄압과 토호 세력의 핍박으로 종교의 자유는 물론 설 자리 마저 잃어버렸지만, 최제우의 뒤를 이은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중심으로 동학의 체계를 정립하고 교단의 조직을 확립하며 점차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1890년대 들어서면서 변화를 하게 되었다. 날로 가혹해지는 탄압과 수탈을 계속해서 당할 경우는 동학의 존속과 확장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적으로 교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결단과 조처를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더욱이 1883년 조선이 영국과 맺은 ‘조영수호통
[완주신문]지난번에는 완주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큰 틀에서 설명하였다. 이번부터는 동학의 창도(創道)부터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긴 여정을 완주를 중심으로 차례로 연재하고자 한다. 다만, 주의할 것은 완주의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요 지역에 집중된다. 즉 삼례와 고산, 그리고 대둔산 등이다. ■ 동학 창도와 전라도 포교 19세기 중반, 우리나라에도 서구(西區)의 열강(列强)이 동양(東洋)을 압박하는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특히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던 대국(大國) 중국이 1842년 영국과 아편전쟁(阿片戰爭)에서 패배하고 수도 북경이 함락당하며 굴복함으로써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의식이 증대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 사회는 60여 년에 걸쳐 특정 가문과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해(弊害)로 인해 탐관오리의 부정과 부패가 일상화되어 오갈 데 없는 민중은 희망마저 잃었다. 경상도 경주의 유력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불운을 겪어야 했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음), 경주 용담정에서 모
[완주신문]1894년 2월 15일, 전라도 고부 땅 말목장터에 모인 군중(群衆)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학정을 규탄하며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조병갑은 도망하였고, 관아를 점령한 군중은 봉기의 지속과 확산을 모색하였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이후 2개월여 동안 고부에서 농성하던 군중은 3월 13일 이웃 고을 무장(茂長)으로 이동하였고, 세력을 결집한 군중은 다시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백산에 집결하였다. 백산에 집결한 군중은 고부와 무장을 거쳐서 모인 것만 아니었다. 고부 관아 점령을 시작으로 1월부터 3월까지 이어진 농성의 연장으로 전라도 일대 동학교도와 농민이 모인 것이다. 이때 백산에 모인 군중은 8천여 명에서 4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백산에 집결한 군중은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혁명군을 조직하고, 혁명의 뜻을 밝히는 격문(檄文), 강령(綱領)에 해당하는 사대명의(四大名義),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의 군율(軍律)을 선포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혁명은 같은 해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조선의 풍패지향(豐沛之鄕)이며, 전라도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