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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과 완주3]

탄압 극복위해 교조신원운동 전개

[완주신문]조선 정부는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과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하고, 동학을 그릇된 교리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교(邪敎)로 단정하며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로 인해 동학교도는 관원(官員)은 물론 토호(土豪) 세력에게 핍박과 탄압과 수탈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1890년대 이전까지 동학 지도부와 교인들은 동학교도로 지목되어 체포당하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돈을 바치는 ‘속전(贖錢)’으로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해 다른 고을로 도망을 하거나 피신하는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동학은 관의 탄압과 토호 세력의 핍박으로 종교의 자유는 물론 설 자리 마저 잃어버렸지만, 최제우의 뒤를 이은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중심으로 동학의 체계를 정립하고 교단의 조직을 확립하며 점차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1890년대 들어서면서 변화를 하게 되었다. 날로 가혹해지는 탄압과 수탈을 계속해서 당할 경우는 동학의 존속과 확장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적으로 교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결단과 조처를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더욱이 1883년 조선이 영국과 맺은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에는 “개항장에서 영국인은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린다.”라고 하여, 개인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나 선교(宣敎)의 자유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으나, 1886년 프랑스와 맺은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가 ‘교회(敎誨)’라는 단어로 묵인(默認)되어, 이전과 달리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후 외국에서 들어 온 천주교(天主敎)와 개신교(改新敎)의 전교는 묵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동학은 지속해서 탄압당하였다.

 

특히 1892년 봄부터 수탈과 탄압의 빈도가 늘어났다. 이에 자극받은 동학 교단과 교도는 교조의 신원[伸冤․원통한 일을 푸는 것으로 사면복권(赦免復權)과 같은 뜻]을 통해 종교 활동을 인정받으려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교세(敎勢)의 급격한 증가와 교단의 조직화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동학 교단은 1892년 후반기 충청도 공주(公州)와 전라도 삼례(參禮), 1893년 전반기 충청도 보은(報恩)과 전라도 금구(金溝)에서 이른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동학 교인들은 충청 감사와 전라 감사에게 다음과 같은 3가지를 요구하였다. 

 

첫째,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교조 최제우의 ‘사면복권(赦免復權)’과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 줄 것. 

 

둘째, 동학 금단(禁斷)을 구실로 내세운 지방관과 토호 세력들이 저지르는 동학교도에 대한 수탈(收奪)과 탐학(貪虐)을 금지해 줄 것. 

 

셋째, 서양과 일본 등 외국 열강의 침탈에 맞서는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에 나설 것 등이었다. 

 

첫째와 둘째 요구사항은 종교적인 목적을 가진 종교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요구사항은 종교적 목적보다 그 당시 민중과 조선이 처한 상황을 대변하는 정치투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장차 교조신원운동이 종교운동을 거쳐 정치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예측하게 한다. 그것은 동학 교단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당시 민중의 염원(念願)과 요구사항을 동학이 수용하여 집약적으로 대변한 것이었다. 즉 동학 교단 지도부가 민중의 광범위한 바람을 수용하여 조직적으로 계속해서 척왜양창의운동을 전개할 것을 암시(暗示)한다. 


삼례취회에 앞서 개최한 공주취회는 1892년 여름부터 준비되었는데, 신중을 거듭하던 최시형은 동년 10월 17일에 “각 접주(接主)는 믿을 만한 교인들을 데리고 ‘공주의송소(公州議送所)’로 모이라.”는 ‘입의통문(立義通文)’을 전국의 동학교도에게 보냈다.

 

공주에 모인 동학교도는 1892년 10월 20일경 충청 감사 조병식(趙秉式)에게 교조의 신원과 함께 동학교도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침탈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각도동학유생의송단자(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밤낮으로 수도하고 축원하는 것은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保國安民)’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하였다.

 

① 동학은 사학(邪學)이 아니라 유교․불교․선교(儒佛仙)을 합일한 것으로 유교와는 대동소이(大同小異) 하지만 이단(異端)이 아니다. 

 

② 서양 오랑캐의 학문[西夷之學]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왜(倭)의 해독은 다시 외진(外鎭)에서 날뛰고 있고, 흉역(兇逆)의 무리가 일어나고 있다. 

 

③ 특히, 왜국은 각 항구에서의 통상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고 전곡(錢穀)을 다 빼내어 가기 때문에 백성들이 어려움에 있다. 서울과 요해처(要害處), 관세(關稅)와 시장세(市場稅), 산림천택(山林川澤)의 이익이 모두 외부의 오랑캐에게 돌아간다. 

 

④ 가혹한 탄압으로 교도들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체포한 교도들을 석방해 달라. 

 

⑤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임금에게 아뢰어 달라(啓達).

 

먼저 동학은 유․불․선을 합일하여 유교와 거의 같은 것으로 ‘사학이나 이단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서양 오랑캐의 학문인 천주교와 일본의 해독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 임금에게 불충하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흉악한 무리가 생겨나고 있으며,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백성이 어려움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동학교도 역시 같은 조선의 백성으로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마음의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할 것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붙잡아 간 교인들을 석방해 줄 것과 최제우의 신원을 임금에게 전달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동학은 사학(邪學)이 아닐뿐더러 유교와 유사(類似)함을 강조하고, 가혹한 탄압으로 억울하게 붙잡힌 교인들의 석방과 최제우의 신원을 임금에게 전달하여 해결해 줄 것 등의 요구는 종교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양 세력의 학문적[천주교] 침투와 일본의 일방적인 경제 침탈에 대한 지적은 결코 교조신원운동이 종교운동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 보아 동학 교단은 공주취회 전부터 외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공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종교운동을 넘어 반외세운동까지 염두(念頭)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학 교단의 요구에 대해서 조병식은 “동학은 이단(異端)일 뿐이며, 사학(邪學)의 여파(餘派)로 규정하고, 금단(禁斷) 여부의 문제는 조정에서만 처분을 내릴 수 있다.”라고 하면서 교조 신원을 거부하였다. 대신 충청도 각 지방에 “동학은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나 동학을 금단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폐단을 모두 중지하라.”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지방관이 동학교도의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억지로 가져가는 것(討索)을 금지해 달라는 요구는 수용한 것이다. 비록 교조 신원의 염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동학교도라는 이유만으로 지방관에게 탄압과 수탈을 당해야 했던 동학의 교인이나 교단으로서는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