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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모든 것을 잃고 독립정신을 일깨운 형제 의병을 아십니까?

[완주신문]“전북 전주군(현 완주군) 비봉면 소농리에 살던 이순옥은 한일합병 당시 전북 경내를 흔든 의병장 유치복의 생질로 자기 형 원옥과 함께 그 부하가 되어 그 대장 격으로 크게 활동하다 기 대장이 불행히 일본 관헌 손에 잡히자 그 단체의 운명은 다해 눈물을 머금고 각기 헤어져 유리 표박하다가 자최를 감추어 처자로 더불어 여생을 보내고자 집에 잠복하여 있는 것을 밀정이 탐지하고 체포하야 가진 형벌을 당하고 대구지방법원으로 넘겨 15년이라는 언도를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철창생활을 해 오다 11년 만에 가출옥이 되어 지난 16일 전기 고향에 돌아갔던바 자기 형 원옥은 일찍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자기만 홀로 그리운 처자를 만나려 하였으나 그 아내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개가했을 뿐 아니라 그 형수조차 또한 그러하였고, 자기가 살던 집은 벌써 형적조차 없어져 전북 부호 백인기 씨 소유 논이 되고 말았으므로 이 광경을 목도한 그는 끝없는 세상의 변천에 아픔을 억제하고 지난 19일(?)밤 그 동리 앞 ‘불무청리’ 주막 조성근 집에서 그날 밤을 지내던바 밝는 새벽에 가졌던 주머니칼로 자기 목을 찌르고 오랫동안 고민타가 오전에 이르러 그만 황천의 객이 되고 말았다는데 그는 약간의 금품을 가졌다 하며 경찰은 타살이 아닌가 하고 시체를 검안하였으나 자살이 분명하다 하더라(이리)”

 

1925년 9월 22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전문이다. 비봉에는 고흥 유씨 일문구의사 사적비(高興柳氏一門九義士事蹟碑)가 있다. 한 가문에서 아홉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구의사(九義士)는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에서 출생한 유중화(자는 치복)를 중심으로 한 유연청, 유영석, 유연풍, 유태석, 유연봉, 유명석, 유준석, 유현석이다. 모두 한 집안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과 같이 활동했던 두 사람이 더 있다. 바로 유치복의 생질인 이원옥과 이순옥이다.

 

이원옥과 이순옥은 1910년경 외삼촌인 유치복의 의진에서 간부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형 이원옥은 감옥에서 순국하고, 동생 이순옥은 11년 만에 출옥하여 돌아온 고향에서 자결하였다. 11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부인과 형수는 재가하여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되었고, 가지고 있던 재산은 임의로 처분되어 백인기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그 참담함을 이순옥은 가지고 있던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므로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원옥·이순옥 형제의 항쟁 사례는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의 야만성과 전라북도 일대에서 전개된 후기 의병 최후의 활약상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남한대토벌작전이란 일제가 국내의 의병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 작전으로 여기서 말하는 남한은 호남지방을 의미한다. 일제는 왜 호남을 표적으로 공격하였을까? 호남 지역의 의병은 의병장 약 50명을 포함하여 약 4,000여 명에 달했다. 이처럼 호남 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이유는 이곳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본거지로서 반일 의식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인에 의한 토지 침탈, 경제적 수탈이 극심하여 반일 의식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는 호남 지역의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진행하였다.

 

‘남한대토벌작전’ 작전으로 사망한 의병의 수는 1만7779명, 부상자 376명, 포로 2139명이었다. 이 작전 이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 세력은 더는 한반도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다. 이때 유치복을 비롯한 열 한 명의 의병과 100여 명의 장졸이 완주군에서 희생되었다. 이들은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나라는 외면했고, 위정자들은 알아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고흥 유씨 가문에서는 그들을 기억하며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마저 끊긴 이원옥, 이순옥 형제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많은 이들이 완주 정신을 이야기한다. 무엇이 완주 정신일까? 후손도 없고 잊힌 형제의 의로운 죽음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완주 정신이 아닐까? 이로운 죽음을 기억하겠다는 군수 후보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헛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