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신문]헌법 제1조 1항에 정의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말하는 민주공화국은 ‘민주정’과 ‘공화정’을 함께 추구한다는 선언이다. 민주정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뜻이며, 공화정은 나라의 통치를 왕이 아니라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에서 공화정에 대한 유래는 중국의 역사서 <사기>의 ‘반란으로 임금이 없는 상태에서 제후들의 추대를 받은 사람이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라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제왕이 다스리던 중국에서도 국민에게 주권을 위임받은 사람이 나라를 다스린 적이 있다니 놀랍다. 이처럼 민주 공화정의 핵심은 주권이 백성에게 있으며, 왕이 아닌 백성이 선출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세계사에서 청교도 혁명으로 잉글랜드의 군주제를 폐지한 올리버 크롬웰을 최초의 공화주의자라 칭한다. 그러나 크롬웰보다 60년이나 앞서서 공화제를 주장했던 인물이 완주에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급진적 사상
완주군 상관면 월암마을에서 태어난 정여립(鄭汝立)[1546~1589]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이다. 1567년 21세에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70년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 총명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사상이 급진적이어서 걱정거리였다.
모든 사상을 포용하는 분방한 성격은 당색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이런 자유분방함은 당시 사대부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신분과 관계없이 학문을 나누고 무술을 연마하며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꿈꾸던 대동(大同)세상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믿는 신분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불온해도 너무 불온한 사상이었다. 결국 역모의 고변이 있었고 그의 가족은 3대가 멸족되었으며, 천명이 넘는 선비들이 죽어 나갔다. 이 엄청난 살육을 기축옥사라고 부른다. 조선의 3대 사화 때 희생된 사람을 모두 합한 수보다 더 많은 사람이 기축옥사로 죽었다. 호남의 선비들의 씨가 말랐다고 할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축옥사에 관련되어 죽은 많은 선비는 옥사가 끝나자마자 복권되었지만, 정여립만은 끝내 복권되지 못했다. 전주에 근거를 두었던 동래 정씨 일족들은 전국으로 흩어졌고, 정여립은 족보에서도 삭제되었다. 그가 살던 집은 파헤쳐지고 연못으로 만들었다.
정여립이 꿈꾸던 대동세상
정여립이 꿈꾸던 대동세상은 천하는 공공의 것이기에 주인이 없으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왕조사회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허균에 의해 천하에 두려운 존재는 백성뿐이라는 호민론(豪民論)으로 진화하였다. 결국 허균도 역모를 꾀한 혐의로 능지처참 되었다. 이후 정약용은 중국의 탕왕과 무왕이 왕조를 교체한 것처럼 무능한 왕은 혁명을 통해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여립의 자유, 평등, 대동사상은 동학의 정신과 닿아 있다.
시대를 앞선 선각자 정여립의 정신은 완주정신이다. 자유와 평등, 대동세상을 꿈꾸던 동학 농민들은 완주에 모였고, 그들의 정신은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3·1정신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민심은 독재를 거부하며 광주혁명으로,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천하는 공공의 것으로 오직 백성만이 두려운 존재이며, 무능한 정권은 백성의 힘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민주공화국의 뿌리가 완주에 있다. 이 아름다운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갈 책임이 완주에 사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정여립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