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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영웅]웅치・이치전투 의병장 황박

[완주신문]2021년 한해동안 매달 한번씩 완주의 정체성이란 주제로 글을 썼다. 완주의 정체성을 꼽으라 하면 웅치・이치 전투로 대변되는 국난극복과 동학 농민혁명의 민중항쟁이다. 웅치・이치 전투와 동학 농민혁명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이름 없는 민중이라는 것이다.

 

2022년은 보통 사람들의 영웅적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처음 소개할 영웅은 임진년(1592년) 풍전등화 앞에 서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순절을 선택했던 이름 없는 의병들 이야기이다. 왜군은 1592년 4월 명나라를 치러 갈려고 하니 조선 땅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며 동래에 상륙하였고, 20일 후에는 한양을 함락하였다. 관군은 연전연패하고 임금은 의주 압록강 변에서 명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어느 때나 전쟁이 터지면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은 여자와 아이들이다.

지도자들 그 누구도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데 나라를 구하겠다고 죽음의 자리에 선뜻 나선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의병이다. 의병이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의로운 병사를 말한다. 군번도 계급도 없는 민초이다. 이름 없는 민초들이 분연히 일어설 수 있도록 지도하고 이끌었던 의병장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은 완주에서 활약한 웅치・이치 전투의 영웅 의병장 황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의병장 황박은 현재 익산시 왕궁면 장암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우주(紆州), 호는 죽봉(竹峰)으로 조선의 개국공신 문숙공 황거중(黃居中)의 후손이다. 족보를 비롯하여 여러 기록에서 황박 장군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기록들이 너무 간략하고 꼼꼼하지 못해 자세히는 알 수 없었는데 ‘김제향교지’ 충훈 편에서 한 줄 찾을 수 있었다. 김제향교지에는 ‘문숙공거중후임난순절이치증병사명정충(文肅公居中后壬亂殉節梨峙贈兵使命旌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뜻은 “황박은 문숙공 거중의 후예로 임진왜란 시 이치전투에서 순절했고 증직으로 병사를 받았으며 충신으로 정려를 받았다”이다. 황박의 선조인 문숙공 황거중은 우주황씨(紆州黃氏) 중시조로,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남원 운봉 전투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종사관으로 참전한 개국공신이다. 황거중의 묘는 비봉면 내월리에 있다.

의병장 황박은 무과 급제 후 전주 만호로 있었다. 1590년 부친상을 당했고 시묘살이 중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 시묘살이를 청산하고 의병 500명을 모집하여 고향에 홀로되신 어머님과 부인,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죽을 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그의 나이 28살이었고, 3대 독자였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막힌 왜군은 물자가 풍부한 전라도를 차지하기 위해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전주성의 수성 장군은 이정란이었고,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 해남 군수 변응정, 김제 군수 정담은 웅치에 배치되었다. 목책과 해자로 방어진을 구축한 웅치의 책임자는 김제 군수 정담이었다. 정담은 제3 방어진지에, 해남 군수 변응정과 나주 판관 이복남은 제2 방어진지에, 최전선인 제1 방어진지에는 의병장 황박이 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김제군수 정담을 비롯한 김제 출신 장졸 500명과 진안 의병 김수· 김정 형제와 그의 식솔 100여명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모두 웅치에서 순절하였다. 죽음으로 웅치를 지킨 이름 없는 백성들이 있었기에 전주성을 지킬 수 있었다.

웅치의 선봉장 황박과 주력부대를 이끌던 황진은 부하들을 이끌고 이치의 권율 장군 휘하에 배치를 받았다. 이치의 선봉장은 동복(현 화순) 현감 황진이었고 후군장은 의병장 황박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 기사에는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북대 하태규 교수는 “선군장 황진 장군이 이마에 적탄을 맞고 졸도하여 쓰러지자 왜적들이 포위하여 좁혀 오자 황박 장군은 이를 뚫고 들어가서 대적하다 8월 28일 전사하였다”라고 이야기한다. 고향에 계신 어머님께는 9월에야 3대 독자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통곡하다 졸도하였고, 식음을 전폐하자 전라감사 김광혁이 선조에게 음식 하사를 건의하여 계사년(1593년)에 선조가 하사한 음식​이 고향 집에 도착하였다.

의병장 황박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고 고산면 어우리 샘골 우주황씨(紆州黃氏) 전주파 종산에 ‘황박(黃璞)’의 제단(祭壇)이 있으며 김제시 용지면에 충신 황박 정려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말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이치와 웅치에서 호남을 지킨 사람들은 이름 없이 죽어 간 전라도 의병들이다. 이 무명의 의병을 기념하는 비석이 이치에 있다. 이들의 희생을 기억할 때 완주의 정체성이 바로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