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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정체성 찾기5]이치전투

1500명이 일본군 1만5000명을 막아낸 전투

[완주신문]1592년 임진왜란 개전 20여일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까지 올라갔던 왜군은 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라도를 점령하기로 한다. 왜군은 용인, 청주, 영동을 거쳐 전라도 금산으로 진격해 온다.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주로 진격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웅치전투와 이치전투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전라도 관문 금산성 함락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은 4만의 군대를 이끌고 그해 6월 21일 닥실나루에 도착하였다. 영동에 온 일본군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군과 대치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강의 깊이를 알지 못해 건너지 못하고 있는 왜군 앞에 한 아낙이 치마를 걷고 나루를 건넜단다. 이 아낙은 금산 군수 권종을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원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아낙 덕분에 강이 깊지 않음을 알게 된 왜군은 물밀듯이 저곡산성으로 밀려들었다. 저곡산성에서 권종과 600명의 장병은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절하였고, 저곡성을 돌파한 왜군은 금산성에 무혈 입성한다. 권종은 조선개국공신 권근의 6대손으로 권율장군의 사촌형이다.

 

닥실나루와 저곡성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내비게이션에 금강국민여가오토캠핑장을 찍고 찾아가면 된다. 닥실나루 표지석은 캠핑장 입구 강변에, 저곡성은 캠핑장 뒤쪽 산책로인 금강 솔바람 길에 있으며, 제원대교 부근에는 충민공 권종의 순절비가 있다. 금강 솔바람길 1코스는 닥실마을에서 시작해서 닥실재로 내려오며 약 1시간 30분정도 소요된다. 이 길은 우리가 잊고 있는 옛길로 임진왜란 당시 이 길을 지키기 위해 권종이 이곳에서 순절하였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의병장 고경명 전사  
7월 2일 담양에서 거병하여 의주의 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북상하던 의병장 고경명은 여산에서 금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주성 함락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말머리를 돌려 진산에 진을 치고 왜군과 대적할 준비를 한다. 7월 5일 조헌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10일 금산성을 같이 공격하자고 제의한다. 금산성을 차지한 왜군은 7월 6일 부대를 나눈다. 총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본대는 이치를 넘어 전주로 향하고, 아들인 고바야카와 타로가 이끄는 부대는 송치, 용담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성에서 만나기로 한다. 웅치에 도착한 왜군은 7월 8일부터 10일까지 웅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7월 7일 고경명은 군사를 누운벌로 이동하고 금산성 공격을 준비한다. 7월 9일과 10일 아직 조헌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금산성을 공격하여 왜군과 격전 끝에 아들 인후와 함께 전사한다. 고경명 장군의 금산성 공격이 있던 날은 웅치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금산성 공격에 같이 참전했던 고경명의 장남 종후는 살아남아 스스로를 복수장군이라 부르며 의병을 모아 항전하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남강에서 순절한다.

 

고경명 선생의 비각은 선생이 순절한 건너편 산기슭인 금성면 양전리에 있다. 처음 비석은 선생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효종 때 금산군수 여필관이 비문을 지어 세웠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비석을 파괴하였고 195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고 석조비각은 1962년에 만들었다. 전통비각에는 깨진 비석과 글이 지워진 비석이 남아 있다. 딱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백성만 괴로운 게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장이다. 

 

 

10배 적을 물리친 전투
금산성 전투는 왜군에게 상처뿐인 승리였다. 고경명과 의병을 물리쳤지만 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웅치로 보냈던 군사들은 안덕원까지 갔다가 패하여 돌아와 송치에 머물고 있었다. 7월 20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금산성에서 나와 이치에 도착하였다. 이치에는 웅치전에 참여했던 황박, 황진, 권율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웅치전에 참여하였던 황박과 황진이 참전한 것을 보면 웅치전 이후에 이치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군 1천5백이 일본군 1만5천을 막아낸 전투로 황박 장군이 전사하였고 황진 장군이 부상을 입었다. 완벽하게 열세인 상황에서도 권율 장군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왜군을 궤멸시킨다. 이치대첩 후 권율은 전라감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고 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북상하여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에 넣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치대첩이 행주대첩보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권율장군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이 쓴 글에 의하면 임란초기 조정이 어수선하여 공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웅치와 이치 전투에 참여하였던 장군들이 모두 전사하여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는 것도 이유라고 생각한다. 웅치와 이치에서 살아남았던 황진장군도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전사한다.

 

이치전투 유허비는 황진장군 전승 기념비와 임란 때 순국한 무명의 4백 의병을 기리는 비석과 함께 금산군 진산면과 완주군 운주면의 경계인 대둔산 휴게소 한편에 있다. 대둔산휴게소에서 진산 쪽으로 약 2km 정도 내려가면 권율장군 이치대첩비와 사당이 있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고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우리가 이곳을 기억하고 아이들에게 전해 주어야 아이들이 이치전투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하고 전해야 할 완주정신
웅치, 이치대첩과 금산에서 피 뿌린 수많은 의병들이 있었기에 호남이 지켜졌다. 이치의 승전은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순절한 의병들과 웅치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다. 결국 왜군은 전라도 점령을 포기하고 9월 17일 밤을 틈타 아무도 모르게 금산성을 빠져 나간다. 4만의 군사 중 살아서 후퇴한 군사는 겨우 4천명이다.

 

금산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이름 없는 영웅들과 사회적 책임을 다한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돌아봤다. 의병들은 죽을 자리임을 알면서도 마음의 소리에 따라 참전을 하였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이것이 조선 선비들의 솔선수범의 정신이었고 이름 없는 의병의 희생정신이었다. 어느 임금도, 어느 대통령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민초들은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위기 앞에 분연히 일어섰고 하나 뿐인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

 

이분들의 희생덕분에 반만년 역사 중 가장 풍요로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금산군에서는 칠백의총, 이치대첩비, 권율사당 등을 세워 꾸준히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완주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