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선수로3]일제에 대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나?

2023.07.31 10:25:24

[완주신문]어렸을 적부터 많이 듣던 이야기가 있었다.

 

“일본X들이 우리 민족을 식민 지배하며 나쁜 일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하천 정비나 농수로 시설들은 기가 막히게 잘해 놓았어”라는 어르신들의 이야기 말이다. 실제로 일본 식민지배 시기에 많은 강에 방천이 생기고, 농수로들이 만들어져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의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대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다. 우리가 걷게 될 대간선수로를 통해 농업생산력이 획기적으로 증대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 민족은 왜 식민 지배 시절처럼 농업 기반을 잘 만들지 못했을까?

 

일제가 우리에게 주입하고 지금까지도 잔재로 남아 우리에게 속삭이듯 ‘우리 민족이 열등해서 비옥한 땅을 개발하지 못하고 늪지나 황무지로 방치하고 있었을까?’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혹시 우리 민족은 만경강 인근의 열악한 땅을 굳이 개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조선시대의 인구를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의 인구는 임진왜란과 소빙하기 등 요인이 있기는 했지만 1000만명에서 1700만명 사이에서 수렴해 가며 정체되었다. 

 

여기에 쌀 생산량을 살펴보면

 

1912년 생산량이 1156만 석이다. 아직 일제의 본격적인 수리 시설이 설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 시대의 생산량도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고 여기에 잡곡의 소비량을 살펴보면 쌀의 배 가까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1915년에서 1919년까지 1인당 연평균 미곡과 잡곡 2.03석을 소비하였다. 한 석이 144kg이니 2.03석은 290kg이다. 1인당 쌀 소비량이 가장 많았던 1970년에 136.4㎏을 소비하였으니 1인당 소비량이 290kg이면 넉넉한 양이다. 우리 농토에서 생산된 미곡과 잡곡으로 1인당 290kg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생산한 것이니 지나친 수탈이나 천재지변이 심하지만 않다면 우리 민족이 먹고사는 데는 그리 부족해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이 이야기는 식민 지배기 수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으로서는 농사짓기 힘든 늪지나 황무지개발이나 대규모 간척사업이 그다지 간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있는 논과 밭만 잘 농사지어도 먹고살 만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호남평야 최대의 저수지인 익산 황등제나 김제 벽골제 등 훌륭한 수리 시설이 있어 호남평야는 우리 민족의 곡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나라가 일제에 넘어가며 일제는 자국에서 부족한 곡식을 우리 영토에서 생산된 쌀로 채우려 했다. 우리 농지와 농민은 수탈의 대상으로 인식해 수리 시설을 설치해 농지를 늘려 1936년에는 쌀 생산량이 1788만석까지 올라갔지만, 일본으로 951만석을 가져가는 바람에 우리 민족이 소비할 수 있는 쌀은 오히려 개발되기 이전보다 300만석 더 적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1인당 소비량은 2.03석에서 1.64석으로 줄어들었고 해방 무렵엔 1910년대에 비해 소비량이 50% 넘게 줄어 우리 민족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쌀의 생산량은 증대되었지만, 우리 민족은 배고픔에 초근목피로 연명하였고 내가 농사지은 쌀을 내 자식에게 먹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이 땅을 버리고 간도로 해외로 떠나는 이들이 수없이 많아졌다. 여기에 2차대전을 일으키고 나서는 그 정도가 더욱더 극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금 지나친 예이긴 하지만, 인간들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가축을 사육한다. 수익을 증대하기 위해 좋은 시설을 갖추고, 좋은 먹이를 배불리 주며 동물들을 보살핀다. 그리고 이들을 도살해 소득을 올린다. 좋은 시설을 해주고, 배불리 먹여준다 해서 가축들이 인간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더군다나 일제는 우리 민족을 배불리 먹이지도 않았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지도 않았다. 단지 수탈의 대상으로만 인식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 시설을 일본의 유산이 아닌 우리가 잘 관리해서 민족을 먹여 살릴 농업자산으로 인식하면 충분할 것이다. 

 

긴 폭우 장마로 여러 차례 미뤄졌던 대간선수로 답사가 8월부터 시작된다. 아픈 역사의 산물이지만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사용되고 사용될 대간선수로를 걸으면서 어떠한 것들을 마주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조영호 고산주민 dosa209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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