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선수로8]대간선수로에는 어떤 수문들이 있을까?

2024.01.16 11:01:24

제수문, 방수문, 잠관을 중심으로

[완주신문]대간선수로는 만경강 수계 상류의 물(대아댐, 경천저수지)을 고산 어우보(취입구)에서 취수해 63Km의 인공 도수로를 통하여 군산 옥구저수지까지 공급하는 수로로 주로 농업용수로 사용하지만 익산 신흥정수장에서 정수된 물은 상수도로 사용된다. 본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수탈의 물적 토대로 건설된 대간선수로의 역사성과 상징성 ▲대간선수로의 처음 건설과정과 개량 개선에 의해 변화된 현재의 모습 등 토목과 수리 측면에서의 탐구 ▲대간선수로의 기능과 역할, 특히 식량자급 또는 풍년 농사를 위한 거대하고 체계화된 수리시스템에 대한 접근 ▲대간선수로가 통과하거나 지나가는 인근의 도시와 마을들에 관한 이야기 ▲대간선수로의 창조적 미래, 문화적 활용 가능성 등에 대한 탐구 등을 전하려 한다.<편집자주>

대간선수로(Main lrrigation Canal)는 완주군 고산면 어우보에서 군산시 옥구저수지까지 이어지는 약58Km(제1도수로<어우보~후정리> 15Km + 대간선수로<후정리~어은리> 43Km) 길이의 대규모 농업용 수로다. 풍년농사를 위한 농업용수를 완주 익산 군산의 평야부 “농산업단지(논)”에 공급하는 일이 제일 큰 임무다. 

 

수로(물길)는 구조적으로 튼튼한 뚝(제방)으로 구획된 홈통 같은 공간에 물을 담아낸다. 또 이 물을 동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유수만으로 목적지까지 보낼 수 있도록 수로의 기울기(구배)를 적절하게 구현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수로가 제대로 기능한다고 할 수는 없다. 

 

우선 강, 저수지, 보에 모아진 물이 수로에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수문을 '취(입)수문(取入水門, Intake gate)'이라 한다. 또 용수를 필요한 곳에 공급하기 위해서는 수로에서 흐르는 '물의 양을 적당히 조절'하거나 '방류'하기도 한다. 앞의 것을 '제수문(制水門, Regulating gate)', 뒤의 것을 '방수문(放水門, Drainage gate)'이라고 한다. 또 '용수를 용수지선(支線, Branch irrigation canal) 등에 적절히 나누는' 수문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분수문(分水門, Diversion gate)'이라고 한다. 

 

또 수로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는 장애물로 산이나 하천, 철길, 도로 등이 있는데, 이런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터널을 뚫거나 하저 또는 공중으로 통과하는 시설을 베풀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암거(暗渠, Closed conduit, 상부를 개방하지 않는 도랑으로 된 비교적 짧은 수로)'와 '수도(隨道, Tunnel)'와 '잠관(潛管, Inverted syphon, 역사이펀. 수로가 하저부(河底部)를 횡단하는 경우와 같이 낮은 데를 통과하는 U자형의 관로)'과 '통교(桶橋, 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홈통같이 생긴 수로교)'다.

이 글에서는 여러 번에 걸친 필자의 답사 결과와 <전북농조 88년사>, 이종진의 <만경강의 숨은 이야기> 등을 참고하여 대간선수로의 제수문과 방수문 그리고 잠관의 현황과 특징, 역사성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제수문은 대간선수로의 물흐름과 공급을 위한 핵심수문이다. 노선을 제외한 시설들은 현대화 사업으로 재축되어 준공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전세(산북)제수문에는 준공 당시에 부착된 것으로 보이는 명칭석과 씨명비(氏名碑, 공사관계자를 기록한 석판, 일제강점기의 것은 일본식 용어인 씨명비 사용)가 남아 있다. 마산제수문의 경우 옛 제수문의 벽체에 부착된 씨명비가 남아 있다. 잠관의 경우 100년 동안의 지형변화와 개보수에도 당초 위치에 시설이 유지되고 있다. 또 전면 개보수에도 몇몇 잠관은 초기 건설 당시의 시멘트 구조물이 일정부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명칭석과 휘호석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어 일제 강점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럼 1920년 대간선수로의 확장 신설 보수 계획(공사비 내역)에 잡혀 있는 제수문과 잠관 건설 계획, 현재 현황은 어떤지 비교해 보기로 한다.

 

※ 1920년 계획에는 위 표 이외에도 암거 45개소, 분수문 76개소, 
    통교 3개소, 낙차공 17개소, 유입공 7개소, 교량 108개소, 갑문 2개소, 
    삼례 취입구 1개소 등이 있음.
※ 대간선수로의 길이는 1920년 “수로규모일람표”(계획)에 의하면 66.8km
    (제1도수로는 16km, 대간선수로 50.8km)로 제시되고 있으나, 
    제2도수로에 포함되어 있는 임사(산북)지선과 중제지선 7.8km를 제외하면 
    오늘날의 길이와 거의 일치하고 있음.

 


현재 대간선수로 상에서 운용중인 제수문은 모두 17개소(완주 8개소, 익산 3개소, 군산 6개소)가 있다. 방수문은 11개소, 잠관은 모두 8개소다. 지역별로 나누어서 설명하기로 한다.

■완주의 제수문과 방수문과 잠관
제수문 중 완주에 있는 8개소는 제1도수로의 흐름을 따라 율소제(방)수문, 장기제(방)수문, 서두제(방)수문, 구미제(방)수문, 수계제(방)수문, 별산제수문, 마천제수문, 그리고 후정제수문 순으로 설치되어 있다. 기울기(구배)는 급하여 1/1000~1/3000 수준이고 후정제수문을 지나며 1/8000로 완만해진다.

 

율소에서 수계까지의 5개 수문은 조밀하게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표고차 때문으로 보인다. 또 좌우에 방수로가 베풀어져 있어 방수문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수지나 댐의 여수토(餘水吐, Spillway, 잉여수를 흘려 보내는 방수로 통로)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기제수문부터 수계제수문까지의 4기는 수문의 대체적인 규모나 형식이 똑같다.

 

'마천제수문'은 찰방다리에 도착한 대간선수로가 이른바 '독주항(犢走項)' 구간으로 들어서는 출입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후정제수문'은 수문 중의 수문이었다. 전익간선(해전을 들러 춘포로 향함)과 분기하는 곳이었고, 삼례취입보에서 취입한 만경강물을 비비정수로를 통하여 대간선수로로 보충하는 수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과거의 후정제수문은 '삼례의 수리상의 위상을 상징'하는 수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대간선수로의 유량을 제어하는 기능이 전부다.

어우 취입수문을 빠져나온 용수는 잠시 방수로를 800m쯤 달리다가 천호천을 앞두고 잠관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천호천잠관'이다. 대간선수로는 천호천을 곧바로 횡단하는 것이 아니고 약500m를 천호천 하저에서 흐르다가 출구를 통해 다시 율소리 방향의 지상으로 나오게 된다. 대간선수로의 잠관 중 가장 긴 잠관이다. 또 이 잠관은 1920년 당초 계획에 언급이 없던 잠관이다.

 

■제1도수로 현대화 계획과 대간선현대화 계획
제1도수로(어우보~후정제수문) 구간은 '제1도수로 현대화계획(1986년~ 1988년, 1992년)'에 의해 확장 개수되면서 수문들이 재축되었고, 수로는 시멘트 구조물화하였다. 폭은 18m~15m, 높이는 2.5m~1.3m이고 통수량은 32㎥/s의 규모다. 그런데 1992년 개보수 공사 때 설치하였다는 어우리의 신덕제수문(폭 40m, 높이 3.0m, 3련)과 방수문(만경강 방류)은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데 아마도 천호천잠관으로 대체된 것 아닌가 추정한다. 

제1도수로 구간이고 우선천 구간인 별산교(삼례 신금리)부터 찰방다리(삼례리) 구간은 '삼례지구 배수개선사업(1987.12월~ 1997.12월)'에 의해 정비되었는데, 폭은 40m, 높이는 2.9m로 그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는 70년간의 상습 침수 피해를 겪던 석전리, 삼례리의 피해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리과학적 대안으로 모색된 사업이었다. 

 

대간선 구간인 삼례 후정리에서 옥구 어은리까지 43Km의 구간은 “대간선 현대화계획(1989.12월~ 2012.12월)”에 의하여 현대화되었다. 과거 노선을 그대로 사용하되 부지의 폭을 크게 확장하였다. 규모를 보면 폭은 28.5m~8m, 높이는 1.6m였다.(이종진의 <만경강의 숨은 이야기> p.185~189, <전북농조88년사> p.135~138) 

 

■익산의 제수문과 방수문과 잠관
익산에는 신흥/제2도수로제수문과 동산제수문 그리고 탑천잠관제수문 3개소가 있다. '신흥제수문'은 요교(황등)호로 분기하는 제2도수로제수문과 일체형으로 건설되어 있다. 현재 제2도수로는 폐쇄되어 사용되고 있지 않다. '동산제수문'은 과거에 천수선과 산수선이 분기하는 곳이었다. 잠관 앞에 설치된 제수문이 두 곳 있는데 익산의 '탑천잠관제수문'과 군산의 '미제천잠관제수문'이 그것이다. 

 

익산 구간 제수문은 3개소이나 방수문과 잠관은 밀집되어 있다. 제수문과 방수문 기능을 겸하는 완주지역의 5개 제수문을 제외하고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방수문 6개 중 5개(오산, 당산천, 익산도수로, 오산리천, 탑천방수문)가 익산에 있다. 잠관도 모두 8개 중 5개(익산천, 당산천, 오산리천, 삼길천, 탑천)가 익산에 있다. 이는 익산지역에 작은 하천들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방수문과 잠관이 셋트로 있는 곳은 당산천, 오산리천, 탑천이다. 이들 방수문은 잉여수를 당산천(목천포천), 오산리천, 탑천에 방류하게 된다. 대간선수로 상의 '오산방수문'은 대간선수로를 하저의 잠관으로 통과하는 중문천(옛 익산천)에 잉여수를 방류하게 된다. '익산도수로방수문'은 동산제수문 직전에서 대간선 수로의 물을 익산도수로에 방류하여 용수를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는 방수문이다. 참고로 익산도수로는 나포양수장에서 양수한 금강물을 만경강 건너 백구양수장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 천호천잠관을 제외하고 오늘날 목록과 같다. 간(間)은 약 1.8m이다.
※ 옥제천은 미제천으로 추정됨.

 

여기서 잠관의 준공시기나 규모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천호천잠관 이후 처음 만나는 '익산천잠관'은 익산천을 건너 춘포로 들어서는 잠관이다. 지금은 수로에 부유하는 쓰레기를 자동으로 치우는 커다란 '협잡물제거기'를 뒤집어쓴 개량된 모습이다. 당산(목천포)천잠관은 1922.4월(대정 11년), 오산리천잠관은 1921.6월(대정 10년), 삼길천잠관은 1921.6월(대정 10년), 탑천잠관은 1921.4월(대정 10년), 복천잠관은 1921.6월(대정 10년)에 각각 준공되었다. 최초 건설 당시 이들 잠관 모두 양쪽 입구는 철근 콘크리트로, 중앙 수평부는 목관형으로 시공되었다.

 

이후 탑천잠관과 삼길천잠관은 1983년 10월부터 12월말까지 '대간선 개보수사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졌고, 2012년 내부를 보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탑천잠관'은 잠관 입구와 출구에 연결되는 입석양수장이 있어 탑천의 풍부한 용수를 대간선수로에 대량 보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산리천잠관과 삼길천잠관, 이 두 잠관 모두 한 쌍 2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와 폭 2.0m인 2련의 콘크리트 상자 형태의 오늘날 '오산리천잠관'의 모습은 1969년 10월~1970년 1월에 실시된 오산천 개수공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길이가 36m 정도에 불과한 '삼길천잠관'은 '대간선 현대화계획(1989.12월~ 2012.12월)'에 의해 개량되었다. 익산시 오산면과 군산시 대야면을 가르는 '삼길천'은 오늘날 이름조차 없는 배수로가 되었다. 이 천을 잠관으로 가로지른 후 1.5㎞를 가면 다시 잠관을 만나는데, 바로 탑천잠관이다. 이렇듯 목천포에서 대야까지 오산리천, 삼길천, 탑천, 복천잠관 4개가 가까이 밀집해있다. 

■군산의 제수문과 방수문과 잠관
군산의 대간선수로상에는 만자/회현, 개정, 칠다리, 미제천잠관, 전세(산북), 마산제수문 등 모두 6개소의 제수문이 있다. 대야 지경의 '만자/회현제수문'은 대간선과 회현지선이 분기되는 곳이다. 옥석(발산)리의 '개정제수문'은 대간선수로에서 개정(배수)지선으로 분기하는 곳에 있다. 또 이 지점에는 서포양수장에서 양수한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서포소수력발전소'가 있다. 옥구저수지에 가까워질수록 수로 폭은 좁아지고 유량은 적어지며 유속은 느려진다. 이때 서포소수력발전소를 통해 발전용수로 활용된 금강물이 대간선수로에 공급되게 된다.

 

수로의 기울기(구배)를 잠시 보면 익산지역에서 1/10,000~1/12,000이던 기울기가 군산에 접어들면 1/25,000로 크게 완화되고 이 기울기가 옥구저수지까지 이어짐으로써 원활한 용수의 흐름이 곤란할 정도가 된다. 결국 2017년 칠다리제수문을 지나 이곡지역에 가압양수장을 신설하여 '유속증가장치(이곡가압양수장)'를 설치하게 된다. 힘을 얻은 대간선수로는 새롭게 정비된 미제천(은파저수지와 연결되어 있음)으로 들어간다. 물론 정면에는 미제천잠관제수문이 왼쪽과 오른쪽에 이곡(제)수문 설치된 공간이다. '미제천잠관제수문'은 옛 미제천을 건너는 미제천잠관의 앞에 설치되어 있다. '미제천잠관'은 22.5m의 가장 짧은 잠관이다.

 

미제천잠관을 지나면 더는 대간선수로 상에는 제수문이 없다. 다만 옥구저수지 입구에 근접하여 대간선에서 지선으로 분기되는 두 곳에 제수문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임사(산북)지선으로 분기하는 곳에 있는 '전세(산북)제수문'이고, 다른 하나는 중제지선으로 분기하는 '마산제수문'이다. 마산제수문을 통과하지 않은 용수는 옥구양수장에서 양수되어 '옥구저수지'로 들어감으로써 대간선수로의 여정은 마무리된다.

 

여기에 열거된 시설들의 모든 명칭은 인근의 지명에서 온 것들이다. 그런데 딱 하나 예외가 있다. 바로 '전세錢洗제수문'이다. 전세제수문은 대간선수로에서 가지를 치는 지선 초입에 있는데 1922년 6월(대정11년 6월)에 준공된 노후 시설이다. 명칭석과 준공관계자를 기록한 씨명비가 훼손 없이 부착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준공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느닷없이 전세라? 돈을 씻는다니... 지명도 아니고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따져보니 '전세(錢洗)'는 '돈을 씻으면 부자가 된다'는 일본의 풍습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인들에겐 '쌀이 곧 황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수문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런 풍습을 다룬 글들이 인터넷에 간혹 노출되어 있다. 그중의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카마쿠라(鎌倉)라는, 도쿄에서 멀지 않은 역사 도시에 관광객이 많이 찾는 신사가 있는데, 신사 경내에 바위굴이 있고 바위벽 아래를 타고 흐르는 물에 ‘돈(錢)을 씻으면(洗) 부자가 된다’라는 속설로 유명하다. 이 신사를 ‘우가후쿠(우하복, 宇賀福)신사’라 하고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체(神體)는 재물을 관장하는 ‘벤자이텐(변재천, 弁財天)’이라는 여신이다.”

■수문과 잠관에 새겨진 '근대적 욕망'과 '일제 강점'의 역사
대간선수로상의 여러 수문과 잠관에는 화강암에 새겨진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대간선 현대화 사업기인 1987년~1988년에 새겨진 것들은 '박정희류의 근대적 욕망'이 담겨 있으나 대개는 건설 당시부터 있던 것들로 일제 강점의 역사가 짙게 스며있다. 형태는 화강암 덩어리나 석판에 문자를 음각한 방식이다. 크게 두 개의 유형으로 구분하여 해제를 시도하고자 한다. 물론 문자 판독이 훼손이나 난해한 글자체(흘림체) 등으로 어려운 면이 있고, 휘호자에 대한 인적정보의 탐색도 어려워 제한적이지만 일단 시도하고자 한다.

 

1. 하나는 1987년과 1988년에 새롭게 준공된 5개의 제수문(율소, 장기, 서두, 구미, 수계)에 베풀어진 휘호석에 대한 해제다. 나머지 제수문들은 휘호가 전혀 없고, 명칭석이 있어도 모두 기계적인 각자이므로 해제의 여지가 없다. 2. 또 하나는 어우 취입수문과 전세제수문, 옛 마산제수문 잔여 벽체에 부착된 공사관계자를 기록한 씨명비(氏名碑)와 명칭석의 해제다.

 

어우취입수문의 휘호와 잠관들의 휘호, 그리고 휘호자들에 대한 해제는 필자의 언론 기고문 '대간선수로의 일제 강점과 친일의 흔적'을 참고하기 바란다.(완주신문 2023.8.29.일자)

■율소, 장기, 서두, 구미, 수계제수문의 '근대적 욕망'
율소제수문 측면 상단에 '율소(栗所)제수문 정묘(丁卯)년 4월 세(丗)일 준공'이라 새겨진 마룻돌이 올려져 있고, 제수문 정면 상단에는 '복지만류(福祉滿流)'라 새겨진 장방형 화강암 휘호석이 올려져 있다. 정묘년은 1987년이다. 

 

장기제수문에는 '장기(場基)제수문 정묘(丁卯)년 4월 세(丗)일 준공', '만류불갈(滿流不竭)'이, 서두제수문에는 '서두(西頭)제수문 무진(戊辰)년 4월 세(丗)일 준공', '만류불식(滿流不息)'이라 새겨져 있다. 무진년은 1988년이다.

 

구미제수문에는 '구미(九尾)제수문 무진(戊辰)년 4월 세(丗)일 준공', '화이균점(和而均霑)'이다. 여기서 구(九)는 구(龜)다. 수계제수문에는 '수계(峀溪)제수문 무진(戊辰)년 4월 세(丗)일 준공', '호혜이화(互惠以和)'라고 새겨져 있다.

 

그런데 제1도수로의 금석문들은 누구의 글씨일까? 어디에도 휘호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휘호에는 교화적이거나 애국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른바 박정희류의 '근대적 욕망'이 각인되어 있다. '만류(滿流)'라는 표현은 세 곳에나 들어가 있다. 이렇듯 물에 대한 끝없는 추구는 '풍년농사에 대한 국가적 욕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제1도수로의 5개 제수문과 여러 개의 다리에 붙어있는 글씨들의 서체가 한 사람의 것 같다는 것이다. 누구의 글씨일까? 제수문의 글씨체 그리고 현대화 공사 때 놓인 다리들의 이름과 연도 표기의 글씨체도 한사람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증거로 한자로 "ㅇㅇ년 ㅇ월 ㅇ일 준공"이라는 표기에서 마지막은 "ㅇ일"이라고 비우는 게 일반적인데 이들 시설에서는 "丗(세)일 준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들 수 있다.

 

■어우취입수문의 1922년 준공 당시 씨명비
금석문이 중요한 것은 장구한 세월에 견디는 힘 때문이다. 그래서 단 몇 글자나 몇 줄의 글자 기록만으로도 그 힘은 지대하다. 광개토대왕비가 그렇고, 진흥왕 순수비가 그렇다. 추사 김정희가 글씨만 가지고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그가 금석문에도 대단한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한자(문) 기록은 압축적이고 관념적인 한자의 속성으로 인해 근대적 기록의 원칙인 육하원칙에는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지고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노력이 논쟁적 사변적으로 흐르기도 한다. 그러나 돌이나 철의 반영구성을 대체할 수단이 별로 없으니 앞으로도 압축적 금석은 많이 사용될 것이다. 다만 근대적 기록의 원칙이 적용되고, 해독이 쉬운 우리 한글이 사용되길 바란다.

 

어우보와 어우취입수문에는 4개의 금석문이 붙어있다.

 

1. 취입수문 머리에 붙어있는 '개합임천시 開闔任天時'(대정 10년<1921년>, 전북도지사 이스미 나카죠<해각중장 亥角仲藏>)라는 휘호. 뜻은 ‘수문의 여닫음은 하늘이 정한다.’이다.
2. 1922년 수문준공 당시 수문 벽체에 부착했을 것으로 보이는 공사관계자를 기록한 씨명비
3. 1984년에 새로 만든 취입수문에 대한 공사 기본 개요와 관계자가 기록된 석판(현재 2와 3은 수문 측면 하단 벽에 나란히 붙어 있다.) 
4. 1987년 어우보를 현장의 골재를 활용하여 다시 짓고 세운 표지석(뒷면은 간략한 공사개요 및 관계자, 현장 골재 활용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 

 

이중 해각중장의 글씨는 많이 언급되고 있고 3과 4의 것들은 한글과 정자체 한자가 섞여 있어 내용 파악이 쉽지만, 2번의 1922년 석판은 흘려 쓴 한자(초서)여서 읽어 내는 것이 어려운 탓인지 그 내용을 언급한 글을 보지 못했다. 씨명비도 훼손, 오염 등으로 내용을 쉽게 읽어 내기가 어렵다. 전문가에 의한 정밀한 조사가 필요한 이유다.

 

그 당시의 씨명비는 이곳 말고도 대아저수지, 전세 및 마산제수문에서 볼 수 있다. 일정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우에서 좌로 세로형이다. 1행은 기사장, 2행은 담임기사, 3행은 공사감독(또는 감독원), 4행은 공사청부(또는 청부인, 시공자)인이 기록된다. 

 

<어우취입수문의 씨명비> 
1행은 “기사장 귀도일(貴島一)”
2행은 “담임기사 암호영길(岩戶榮吉)”
3행은 “공사감독 대전무지(大田武志)”로 추정 
4행은 “공사청부 아옥길태랑(兒玉吉太郞)”으로 추정

 

<인물 정보>
* 기사장 타카지마 하지메(귀도일, 貴島一) : 총독부 토목과 출신으로 어우보 외에도 마산제수문과 전세제수문의 기사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자가 대간선수로 건설공사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에서 관보. 인물 등으로 22건이 조회된다.
* 담임기사 암호영길(岩戶榮吉) : 인물정보 찾지 못함.
* 공사감독 대전무지(大田武志?) : 총독부 직원록에 1931 충청남도 내무부 토목과 지방 서기라는 기록이 있고 추가적인 인물정보는 찾지 못함.

* 아옥길태랑(兒玉吉太郞) : 1865년 2월 10일 복정현 단생군 사생촌 야말(福井縣 丹生郡 糸生村 野末)에서 출생. 1910년 소림조(小林組)의 현장대리인으로서 용산 부근의 철도 공사를 하기 위해 조선에 건너옴. 공사 종료 후에는 다시 호남선의 건설공사를 담당하였고, 1911년 이리에 본거지를 두고 토목 건축업에 종사하며 업계에서 주목을 받음. 

 

또 아옥은 나주 신사도 짓고 이리에서 아옥조(합자)와 이리연와공장(합자, 1938년)도 설립 운영함. 1933년 청진에서 일본조라는 토목회사를 설립하였고, 1935년 현재 전북토목건축협회장으로 활동. 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10원을 희사하고 총독부에서 목배木杯를 하사받기도 함(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兒玉(아옥) 두 글자는 마산과 전세제수문의 청부인에서도 읽힘(아옥까지만 판독됨).

■전세제수문의 명칭석과 씨명비
'전세제수문(錢洗制水門), 대정11년(1922년) ㅇ월 준공, 성경장(星慶藏)'
- 호시 케이조오(성경장 星慶藏) : 그에 대한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검색 결과 총 61건이 확인된다. 신문스크랩 3건, 조선총독부 관보 35건, 직원록 자료 22건 등이다. 그에 대한 직원록 자료는 1931년까지인데 원산세관 지서의 지서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932.1.1일 자 목포신보에 목포 부윤의 자격으로 칼럼을 낸 사실도 확인된다. 전세제수문이 준공되던 1922년에는 전라북도의 도이사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세제수문 씨명비>
1행 “기사장 타카지마 하지메(귀도일,貴島一)”
2행 “담임기사 전전신지조(前田新之助, 마에다 신노스케)”
 - 인물정보 찾지 못함.
3행 “감독원 조영윤(趙永允)”
 - 인물정보 찾지 못함.
4행 “청부인 아옥(兒玉)ㅇㅇㅇ”
 - 아옥길태랑(兒玉吉太郞)으로 추정 가능.

 

■마산제수문 명칭석과 씨명비
'마산제수문(馬山制水門), 대정 11년 ㅇ월 준공', 휘호자 판독 불가.
<마산제수문 씨명비> : 씨명비 하부 시멘트로 글자 매립
1행 “기사장 타카지마 하지메(귀도일 貴島一)”
2행 “담임기사 전전신지조(前田新之助, 마에다 신노스케)” 
3행 “감독원 하(河, 이하불상)”
4행 “청부인 아옥(兒玉, 이하불상)”
 - 아옥길태랑(兒玉吉太郞)으로 추정 가능.

 


결론 삼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정조 22(1798)년 11월 30일 오위도총부에 속한 종사품의 벼슬인 부호군(副護軍) 복태진(卜台鎭, 1732 ~ 미상)의 상소(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에 응한 상소)를 인용하고자 한다.

 

“농사일에 있어서 급선무는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며, 수리의 공효는 제언을 쌓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원문 : 農功之所先務, 莫要於興水利, 水利之效, 莫要於堤也.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현장에 가보아라! 현재 대간선수로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설들은 많이 노후화되어 있고 관리마저 부실해 보인다. 또 농업의 첨단화 등 양상 변화를 선도하는 새로운 기술과 장비들의 현장 적용(투자)은 눈에 띄고 있지 않다. 일제가 입혀준 옷 한 벌로 100년을 견뎌왔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복태진의 “흥수리, 수리지효”(興水利, 水利之效)”라는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때다.

김장근 전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 dosa209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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