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선수로5]일제강점과 친일의 흔적

2023.08.29 08:16:03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완주신문]대간선수로는 만경강 수계 상류의 물(대아댐, 경천저수지)을 고산 어우보(취입구)에서 취수하여 63Km의 인공 도수로를 통하여 군산 옥구저수지까지 공급하는 수로로 주로 농업용수로 사용하지만 익산 신흥정수장에서 정수된 물은 상수도로 사용된다. 본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수탈의 물적 토대로 건설된 대간선수로의 역사성과 상징성 ▲대간선수로의 처음 건설과정과 개량 개선에 의해 변화된 현재의 모습 등 토목과 수리 측면에서의 탐구 ▲대간선수로의 기능과 역할, 특히 식량자급 또는 풍년 농사를 위한 거대하고 체계화된 수리시스템에 대한 접근 ▲대간선수로가 통과하거나 지나가는 인근의 도시와 마을들에 관한 이야기 ▲대간선수로의 창조적 미래, 문화적 활용 가능성 등에 대한 탐구 등을 전하려 한다.<편집자주>

전북 만경강 북쪽에는 전주 익산 군산을 아우르는 너른 평야가 있다. 전북평야나 호남평야로 불린다. 이곳에 생명수를 공급하기 위한 완주 고산(어우보)과 군산 옥구(옥구저수지)를 잇는 63Km의 수로를 통칭 ‘대간선수로’라고 부른다.

 

올해 준공 100년을 맞이한 대간선 수로는 일제강점의 역사, 근대 농업의 역사를 증언하는 ‘근대농업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일제가 건설하였지만,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지어졌고, 우리 손으로 개선 개량하여 지금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대간선수로의 ‘취입수문과 잠관(潛管, 사이폰 siphon)’ 등에는 건설 당시의 기념 휘호(글씨)가 화강암에 음각되어 설치되어 있다. 공사관계자를 기록한 석판 등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나 해제는 없었다. 이에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대간선수로에 남아있는 휘호와 휘호자를 소환하여 일제 강점과 친일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그간 수차의 답사과정에서 확인한 휘호를 물의 흐름 방향대로 개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어우 취입수문
 - 개합임천시(開閤任天時, 전라북도지사 해각중장 亥角仲藏)
2) 목천포천잠관
 - 입구 : 공리주급(功利周及, 전라북도참여관 박영철)
 - 출구 : 탄구의 휘호 복제품
3) 오산리천잠관
 - 입구 : 양국본(養國本, 유하광풍 有賀光豊)
 - 출구 : 오산리천잠관(五山里川潛管, 유하광풍)
4) 삼길천잠관
 - 입구 : 유수앙앙(維水泱泱, 원정웅 原靜雄)
 - 출구 : 삼길천잠관(三吉川潛管, 원정웅)
5) 탑천잠관
 - 입구 : 국리민복(國利民福, 서촌보길 西村保吉)
 - 출구 : 탑천잠관(塔川潛管, 휘호자 판독 어려우나 서촌보길은 아님)
6) 복천잠관
 - 입구 : 연풍인락(年豊人樂, 휘호자는 훼손으로 확인불가)
 - 출구 : 복천잠관(福川潛管, 중촌광길 中村光吉)

 

이외에도 옥구저수지 부근에 있는 두 개의 제수문(전세제수문, 마산제수문)에 붙어있는 ‘전세제수문(錢洗制水門, 대정11년<1922년> 준공, 휘호자 성경장 星慶藏)’과 ‘마산제수문(馬山制水門, 휘호자 연호 등 판독불가)’이 있다.

 

또 공사관계자(기사장, 담임기사, 감독원, 청부인)를 기록한 석판이 어우 취입수문, 전세제수문과 구 마산제수문 잔재에 부착되어 있으나 흘려 쓴 글씨와 시멘트 등으로 덧 씌워져 있어 정확한 판독이 어렵다.

 

정리해 놓고 보니 꽤 많다. 관리기관이나 전문기관의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더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일반 시민이 진행하기에는 안전과 장비 문제, 전문 지식 부족 등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순서대로 보자.

1) 개합임천시(開閤任天時), 대정(大正) 10년(1921년) 12월 준공, 전라북도지사 해각중장(亥角仲藏, 이스미 나카조).

직사각형 화강암 덩어리에 한자로 새겨져, 고산면 어우 삼거리 대간선수로 출발점인 취입수문 상단에 올려져 있다. 뜻은 ‘여닫음을 하늘의 때(천명)에 맡긴다.’정도 될듯하다.

 

해각중장(1878~1953년)은 교토 출생으로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문관고등시험(이른바 “고문<高文>”)에 합격하고 경찰서장 등 다양한 관직을 거쳐 전라남도 도지사를 2년간 역임하고 바로 이어서 전북도지사가 되었다. 그는 친일반민족 행위자인 이진호(1867~1946년, 도지사 1916.3~1921.8월)의 뒤를 이어 도지사가 되었고, 꼬박 4년(1921.8~1925.8월)을 하였다.

 

그는 도지사 때부터 동진수리조합 창립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창립인가(1925.8.19)가 나자마자 같은 날 조합장에 취임하여 4년을 재임(1925.8~1929.8월)한다. 그는 운암제 건설, 유역변경 도수로와 발전소 건설, 그리고 간선수로 구축과 대규모 간척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현재 김제평야의 광대한 수리체계와 농사체계 그리고 광활한 평야는 그가 조합장이던 시절에 밑그림이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조선 산미증식계획(1920~1934년)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결국 식민지 수탈의 체계화 제도화였고, 또 항구화를 위한 물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2) 공리주급(功利周及), 대정11년(1922년) 4월 준공, 전라북도 참여관 박영철.
익산시 오산면 원석암마을 경우(耕友)정 옆에 있는 ‘목천포천 잠관’의 입구 벽면에 있는 휘호다. 반대편 출구에는 입구 쪽 휘호를 그대로 복제한 모조품이 붙어있다. 아마 개량공사 때 붙인 듯하다.

 

그런데 공리주급이라고? 뜻은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하다. ‘공리를 널리 미치게 한다.’ 그런데 공리가 공공(공중, 공공단체)의 이익인 “公利가 아닌 功利”다. 국어사전을 보면 功利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박영철의 공리는 어떤 것일까? 1. 공명(功名)과 이욕(利慾)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공로(功勞)와 이익을 아울러 이르는 말. 3. 다른 목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이도 아니면 벤담(Jeremy Bentham)의 “功利(utility)”인가? 그의 자발적 친일, 일편단심 친일매국 행각으로 볼 때 그의 공리는 “공명(功名)과 이욕(利慾)”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싶다.

 

박영철(1879~1939년)과 그의 아버지 박기순(1857~1935년)은 전주 익산 출신의 전국구급 친일반민족행위자다. 박기순은 미곡상으로 시작하여 이리 신도시 개발과정에서 큰 부를 모았다. 

 

박영철은 일본 육사를 나왔고, 러일 전쟁에도 종군하였다. 1912년 익산군수, 함경북도참여관, 1920년 전라북도참여관, 이후 강원도와 함경북도지사를 하였다. 또 동양척식회사 감사, 삼남은행장, 조선상업은행장 등도 역임한다. 1933년, 드디어 그는 대를 이어 “친일파 명예의 전당인 중추원의 참의”가 되어 죽을 때까지 한다.

 

그가 집필한 ‘내선융화책 사견’이라는 글에서는 ‘조선인은 무능하여서 자립할 수 없으므로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일본도 이런 조선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라고 했다. 일본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됐으며 일본과 융합해야 한국은 잘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박영철의 주장은 오늘날 한국의 일부 극우세력에게서도 나온다.

3) 양국본(養國本), 대정 10년(1921년) 6월 준공, 유하광풍(有賀光豊, 아루가 미츠토요).
익산시 목천동 번영로 상 신용교 옆에 있는 ‘오산리천잠관’ 입구에 있는 휘호다. 반대쪽 출구에는 역시 유하광풍이 쓴 오산리천잠관(五山里川潛管)이라는 글씨가 있다. 

 

양국본의 뜻은 ‘국본을 기르는 것’, 그리고 국본은 나라의 근본(기본)이 되는 것이니 이 ‘대간선수로가 나라를 기르는 근본’이라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유하광풍(1873~1949년)은 나가노현 출신으로 동경법학원 영어법률과를 졸업하고 문관고등시험에 합격한 자다. 1906년 진남포 세관장으로 조선에 온 이래 정치, 금융, 경제계의 거물급 인사로 활동했다. 특히 1920년 조선식산은행 두취(은행장)에 취임하여 1937년 사임 때까지 17년간을 재직하였다. 또 그는 조선미(米)의 신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산미(産米)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 산미증식계획 및 숱한 간척사업 등과 관련된 융자는 물론 치수사업, 저축은행설립, 수리조합, 방송사업, 지하자원 개발 및 철도 전력사업 등 폭넓은 개발 사업의 지원을 통해 조선에 근대 자본주의를 이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렇기에 지금도 그를 내세워 일본 식민지 통치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하여 일본을 조선의 구세주처럼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선진 제국주의 일본인’이란 자부심으로 ‘일본 땅으로 거듭날 조선의 개발’에 남다른 집념으로 임했던 근대 일본, 제국주의 일본의 우직한 충신이었을 뿐이다.

4) 유수앙앙(維水泱泱), 대정10년(1921년) 6월 준공, 원정웅(原靜雄, 하라 시즈오)
군산시 대야면 접산리 번영로 상 삼길교 옆 ‘삼길천잠관’의 입구에 있는 휘호다. 반대쪽 출구에는 역시 원정웅이 쓴 삼길천잠관(三吉川潛管)이라는 글씨가 있다.

 

유수앙앙은 ‘강물이 깊고 넓다 또는 흐르는 물의 기세가 대단하다.’라는 뜻이다. 

 

원정웅(1871년~ ?)은 동경부 출신으로 1894년 동경제국대학 공과를 졸업하였다. 일본 삼중(三重)현과 애지(愛知)현 기사로 근무하다 1920년 조선총독부 기사로 옮겨 승진하여 1921년 토목부장이 되었다. 기술직 관료(기사)로서는 처음으로 토목부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25년 횡빈(橫濱, 요코하마)시 항만부장으로 전근하여 상당한 기간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착실한 인물로 오로지 기술의 연구와 시설의 향상과 발전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아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평을 남겼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 

5) 국리민복(國利民福), 대정 10년(1921년) 4월(6월?) 준공, 서촌보길 (西村保吉, 니시무라 야스키치)
군산시 대야면 접산리 번영로 상 탑교 옆에 있는 탑천잠관의 입구 벽면 상단에 있는 휘호다. 반대쪽 출구에는 ‘탑천잠관(塔川潛管)’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나 휘호자는 최종 확인은 안 되나 서촌보길은 아니다.

 

국리민복이라 함은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 일제가 국리민복이라 하니 “정말로?”라고 묻고 싶다. 어쨌든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리민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와 일본인들은 공공연한 차별적 국민관, 아니 어쩌면 당연한 식민지 국민에 대한 차별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대일본제국의 ‘저급 하층의 새롭게 편입된 백성’에 지나지 않게 되어 ‘일본인에게 복종해야 할 존재’가 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우월한 백성들은 우월한 제도를, 미개한 백성들은 미개한 제도를 필요로 한다’라는 주장과 미개한 백성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은 공공연한 것이 되기에 이른다. 결국 조선인들은 ‘도저히 메꿀 수 없는 현저한 차이’를 지닌 ‘저급 하층의 미개한 대일본제국의 백성’으로 대우받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불이흥업(주)의 후지이 간타로의 딸 이노하라 도시코의 주장과 태도다. ‘불이흥업이라는 일개 민간회사가 반도의 국리민복에 크게 이바지하였다’라고 강변하였다. 그녀는 ‘후지회(不二會, 후지카이)’를 만들어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일본의 공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찬양 선전하였다.(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다카사키 소지>,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들<이규수> 등)

 

서촌보길(1865~1942년)은 애원현 출신으로 동경제대와 같은 일류대학을 나오지는 않았지만, 출세가 보장되는 문관고등시험 출신이다. 그들 표현대로 ‘소장(小壯) 시절부터 노력 정진하여 출세한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관료계의 거물이었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장(토목부장 겸임)으로 오기 전에 이미 그는 1917년부터 2년간 시마네현 지사를 지냈고, 1919년 사이타마현 지사를 잠시 지내다 그해 8월에 조선에 오게 되었다. 

 

그는 1924년 말에 관직에서 퇴임하였으나 ‘조선에서 토목식산의 발달 발전은 그의 국장 시절에 가장 볼만한 것이 많았으며, 그의 진지하고 열성적인 노력은 관민이 다 같이 높이’ 평가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

6) 연풍인락(年豊人樂), 대정10년(1921년) 6월 준공. 훼손으로 휘호자 확인 불가.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번영로 상 복교 옆에 있는 ‘복천잠관’의 입구에 있는 휘호다. 반대쪽 출구에는 ‘중촌광길(中村光吉, 나카무리 미츠키치)’이 쓴 ‘복천잠관(福川潛管)’이라는 글씨가 있다. 이곳은 특이하게 연호를 돌기둥에 새겨 세워놓았다. 그리고 연풍인락 옆의 공간은 검댕이로 뒤덮여져 있다.

 

연풍인락, ‘해마다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라는 뜻이다. 비슷한 사자성어들이 많다. ‘연풍민락(年豐民樂)’도 있고, ‘시화연풍(時和年豐)’도 있다. ‘국태민안(國泰民安)’으로 표현되는 이상 정치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결국 인락이나 민락이나 시화도 모두 풍년 농사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를 대변하고 심화시키는 일에 앞장서 온 그들을 볼 때 ‘멋진 휘호’를 편안하게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중촌광길(1876년~?)은 동경부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 법대 출신으로 제일은행에 입행하여 마산출장소장, 평양지점장(평양실업협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이후 조선은행으로 옮겨 검사국장, 서무국장을 하다 1918년 10월 설립되는 조선식산은행의 이사에 취임하고, 1923년에는 만주은행 두취(은행장)에 취임한다. 그는 식민지 수탈제도의 핵심 기관인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이사), 만주은행(은행장) 등에서 최고위 책임자로 활동한 식민제국의 전위였다.

이상과 같이 대간선수로에 휘호을 남긴 것으로 확인되는 자는 모두 6명이다. 전북도지사 1, 조선인인 참여관(부지사급) 1, 총독부 관료(국장, 부장) 2, 경제인(식산은행장, 식산은행 이사) 2명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영철을 빼고는 일본인들이다. 일본인들은 동경제대 등 최고의 대학과 문관고등시험에 합격한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식민지의 심장부에서 일본제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하였다.

 

일본이 일찌감치 문명개화, 식산흥업, 부국강병으로 표현되는 근대화와 자본주의를 추진하고 무력에 기반한 제국주의를 추구하여 우리 땅에 ‘연풍인락’, ‘국리민복’, ‘공리주급’, ‘양국본’ 등의 거창한 휘호를 남겼어도 침략자의 본 모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 모습에서 벗어나는 길은 딱 하나다. 계속 침략 인정과 진지한 반성, 제국주의적 행태와의 확실한 단절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대간선수수로의 거창한 사자성어를 진심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우리도 할 일이 있다. 우선 1923년을 기억해야 한다. 대간선수로와 대아저수지가 ‘전범기업 간조(間組, 하자마 구미)’ 등에 의해 준공된 지 100년이 되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희생자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고 있지 않다. 그 흔한 희생자 위령비 세웠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또 1923년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해이다. 조선인들이 하등 민족, 열등 국민으로 몰려 엄청난 학살과 희생을 치렀다. 진상이 다 규명되지도 않았고 사과도 없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교훈이 되지 못한다.

김장근 전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 dosa209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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