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운주면에서 54년간 농민과 지역사회를 지켜온 운주농협이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수년간 안정적인 당기순이익을 내며 조합원에게 배당해 온 농협이 최근 적자로 돌아선 데 이어, 농협중앙회로부터 합병 권고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추진되는 합병이 과연 운주농협과 조합원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부실 경영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절차보다 합병이 먼저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조합원들의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운주농협은 2023년 3월 현 조합장 취임 전까지 매년 3억~5억 원가량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며 조합원들에게 꾸준히 출자배당과 이용고배당을 실시해 온 우량 농협이었다.
하지만 2025년에는 1억4,900만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불과 1년 만에 손익이 5억 원 이상 악화되면서 창립 이후 처음으로 조합원들에게 출자배당과 이용고배당을 지급하지 못했다. 경영 실패에 따른 피해가 고스란히 조합원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경영 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이른바 ‘탕후루용 냉동딸기’ 매입 사업이다. 비상대책위원회가 파악한 내용에 따르면 2024년 초 이사회에는 창고 임대 건으로 보고됐지만, 실제로는 외부 납품업자로부터 5억400만 원 상당의 냉동딸기가 매입됐다.
지역 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의 판로를 지원해야 할 농협이 외부 농산물을 대규모로 매입한 과정과 이사회 심의·의결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해당 사안은 농협중앙회 감사에서 비정상적인 판매사업과 손실 발생 문제로 지적됐고, 2025년 6월 대의원 임시총회 의결을 거쳐 형사 고발돼 수사기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내부 통제와 조직 운영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현 조합장은 직장 내 괴롭힘 사안으로 고용노동부 조사를 받아 과태료 처분을 받았으며, 농협중앙회 조합감사위원회로부터 직무정지 1개월 조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사회에서는 직무정지 기간을 6개월로 높이는 안건이 의결돼 대의원 총회 표결을 앞두고 있다.
이처럼 경영 부실과 사법·징계 절차가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합병이 전격적으로 추진됐다. 농협중앙회의 합병 권고 최종 이행 기한은 2027년 6월 26일까지로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대의원과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 충분한 설명과 의견 수렴 없이 지난 8월 12일 화산농협과 합병 업무협약이 체결됐다.
합병은 농협의 이름만 바꾸는 단순한 행정절차가 아니다. 조합원의 재산권과 이용권, 지역농업의 기반은 물론 농협의 역사와 정체성까지 좌우하는 중대한 결정이다. 따라서 합병의 필요성과 예상되는 효과, 부실자산 처리 방안, 직원과 조합원의 권리, 합병 이후의 운영계획 등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조합원의 충분한 숙의와 동의를 얻어야 한다.
특히 합병 과정에서 냉동딸기 사업으로 발생한 손실의 변상 책임과 관련자 징계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합병을 이유로 책임 소재가 흐려지거나 기존의 변상·징계 절차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면 조합원들은 이를 책임 회피를 위한 합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화산농협 조합장의 임기 문제도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비대위는 신설 합병 방식이 적용될 경우 설립추진위원회 구성과 합병농협 조합장 선출 과정에서 현직 조합장의 임기가 사실상 연장되고 향후 출마 기회가 다시 열릴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이번 합병이 조합원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일부 경영진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인지 철저하게 따져봐야 한다.
운주농협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서둘러 간판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손실 발생 원인을 투명하게 밝히고, 책임자에 대한 변상과 징계 절차를 마무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방만하게 늘어난 인건비와 불필요한 예산을 줄이고, 조합원 중심의 경제사업을 회복하는 자구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운주농협은 과거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며 자립해 온 경험과 기반을 갖고 있다. 철저한 책임 규명과 경영 쇄신이 이뤄진다면 다시 정상화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2026년 말까지 손실금 변상과 책임자 처벌을 마무리하고, 2027년 3월 전국동시조합장선거를 통해 새로운 리더십을 세워 경영 정상화를 추진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운주·경천과 같은 농촌 지역에서 농협은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다. 농산물 판매와 영농자재 공급, 각종 지원사업을 담당하며 농민의 생존권과 지역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 기반이다. 합병으로 본점 기능이 축소되면 지역농민의 목소리가 약해지고, 완주군을 비롯한 관계기관과의 협력에도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오는 9월 3일 예정된 조합원 찬반 투표는 운주농협의 존립과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이다. 조합원들은 합병이라는 결과만 볼 것이 아니라, 왜 경영이 악화됐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합병 이외의 정상화 방안은 없는지를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적자는 조합원이 떠안고 책임은 합병으로 덮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운주농협에 필요한 것은 밀실에서 추진되는 성급한 합병이 아니라 투명한 진상 규명과 책임 있는 자구노력이다. 54년 동안 운주농협을 지켜온 조합원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농협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도록 모든 자료와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