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후원하기

[완주 정체성 찾기14]우산정사

나무 인문학과 포옹한 송영구

잃어버린 이름 우주현 이야기

우산정사는 우산에 있는 정사라는 뜻으로 정사는 재실의 역할 뿐만 아니라 문중 자녀들을 교육하는 서당의 역할도 함께 하던 곳이다. 우산정사는 봉동읍 제내리 제촌마을에 있다. 제내리는 방죽 안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고 제촌마을은 방죽마을, 방죽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제내리는 과거 우주현의 중심지였다. 우주현은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우소저현(于召渚縣)으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우주현(紆洲縣), 고려 시대에는 우주현(紆州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409년(태종 9) 이후 전주부에 편입되었다. 우(紆)는 <굽을 우> 로 구부러지다, 두르다, 감돌다 등의 의미이고, 주(州)는 <고을 주>로 고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주(紆州)는 고을을 두르다, 혹은 고을을 품에 안고 있다는 의미이다.

 

봉동의 테크노밸리 일반산업단지와 왕궁, 삼례 일부지역이 바로 우주(紆州)현 이었다. 고려 말까지 우주현은 전주부와 금마군 사이에 있었으며 치소는 익산IC 나가기 전 마지막 주유소 옆에 있는 공항버스 승강장과 주차장이 있던 곳이거나 왕궁면 동용리와 봉동읍 제내리 사이에 있는 학현산성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 시대 우주현은 우북, 우서, 우동으로 분리되었고 쌀 창고인 ‘우주창(紆州倉)’만 남아 있었다. 이후 우동은 봉상과 통합되며 봉동이 되었고, 우북은 왕궁으로, 우서는 오백조면과 함께 삼례가 되었다. 그나마 이름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흔적마저도 없어지면서 우주현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우주현이 사라지며 본향을 잃은 성씨가 있는데 바로 우주 황씨이다. 우주 황씨의 원래 세거지가 지금 진천 송씨의 묘역인 우산 일대이다. 진천 송씨 입향조의 처갓집이 바로 우산에 세거하던 우주황씨 집안이었다. 세거를 이루고 살던 우주 황씨는 떠나고 그 자리에 진천 송씨가 자리를 잡았다.

 

우주 황씨의 세거지에 처음으로 들어온 진천 송씨는 송선문이다. 송선문은 처가집이 있는 이곳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였다.

 

 

주지번과 송영구의 국경을 초월한 우정

송선문의 자손 중 명나라의 한림원 학사인 주지번과 교류한 송영구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신도비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231호이다. 선조실록에는 주지번(朱之蕃)을 초굉(焦竑)· 황휘(黃輝)와 함께 명나라의 3대 문장가로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의 대문장가인 주지번과 송영구는 어떻게 만났을까? 

 

1593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송영구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묵고 있는 여관에서 심부름하는 청년이 장자의 남화경을 외우는 것을 들었다. 장자의 남화경은 사서삼경을 뗀 사람들이 읽는 매우 어려운 책이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송영구가 그 청년을 불러 연유를 물었다. 청년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북경에 왔지만, 노잣돈이 떨어져 여관에서 일하며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가상히 여긴 송영구는 청년에게 조선의 과거시험 답안지 작성법을 알려주고 가지고 있던 책과 돈을 주면서 꼭 과거시험에 붙으라며 격려하였다. 2년 뒤 과거시험에 급제한 청년은 한림원 학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 바로 주지번이다.

 

명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 주지번은 만력제(萬曆帝)는 손자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1605년 사신을 보냈다. 이 사신단의 정사(正使)가 한림원 수찬인 주지번이었다. 주지번은 1606년 한양에 도착하여 황제의 조서(詔書)와 칙유(勅諭)를 전달하였다. 주지번은 다른 사신들과 달리 뇌물 등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등 청렴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에 온 주지번은 스승으로 여기고 사모하던 송영구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송영구의 생가에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현판을 남기고 돌아갔다.

 

 

나무와 마을을 잇는 나무 인문학
이러한 송영구의 유택과 신도비가 있는 우산정사 앞의 방죽에는 백련이 자라고 있는데 이곳이 우리나라 백련 시배지이기도 하다. 송영구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백련을 들여와 이곳에 심었다고 한다. 연꽃이 피는 7, 8월이면 제촌지에 흐드러지게 핀 백련을 감상할 수 있으며 일대는 백련 향이 가득하다. 해 뜨기 전에 방문한다면 연꽃 터지는 소리를 듣는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송영구의 후손들인 우산종중은 백련잎 차와 백련잎 국수를 만들어 보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산정사의 또 다른 볼거리는 소나무이다. 우산정사 주변에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송영구의 며느리인 삭녕 최씨가 시집이 오면서 가지고 온 변산 솔씨를 뿌려서 가꾼 결과이다. 많은 소나무 중에 이름을 가지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두 그루의 소나무는 용솔 혹은 효자솔과 삼정승 소나무이다.

 

 

용솔은 우산정사 안에 있으며 용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용솔은 효자솔이라고도 불리는데 송영구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으며,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는 건물의 지붕 위로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집안의 어른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기에 겸손하게 예를 갖추고 있다고 해석한다. 설마 진짜 소나무가 그런 깊은 뜻이 있기야 하겠나 싶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 말에 동의가 되는 것은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수령은 약 300년 정도로 추정한다.

 

삼정승 소나무는 백련 시배지인 제촌지를 돌아가면 산 입구에 하늘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 소나무는 한 뿌리에서 3개의 줄기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삼정승 소나무는 삭녕 최씨가 뿌리고 가꾼 1세대 소나무로 추정되며 수령은 약 400년 정도이다. 삼정승 소나무 줄기에 깊은 상처가 남아 있는데, 일제 강점기 전쟁 중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송진까지도 공출해 간 흔적이다. 나라에 힘이 없으니 소나무까지도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이곳 우산정사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사람 사이의 우정, 그리고 나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길에서 만나는 인문학이다. 완주에는 보호수가 47종, 54그루가 있다. 보호수가 있는 마을은 200년의 역사가 있으며, 오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나무를 매개로 하여 마을과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낼 나무 인문학 프로그램 50여 개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완주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자산이다. 완주 방문의 해인 올해 신선한 관광상품인 나무 인문학이 운영되기를 기대해 본다.